《녹색평론》제128호 2013년 1-2월호  인쇄용  

 

  선거와 상상력, 녹색국가의 가능성

  김종철

선거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착잡하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사회라면 선거란 일차적으로 그동안 국가권력을 장악·행사해온 정치세력의 공죄(功罪)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잣대가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모든 대의민주주의 선거에는 현 정권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단순하게 해석한다면, 정권교체가 실패로 돌아간 이번 선거는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권이 국민에 의해서 어떻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왜냐하면 선거에 대비하여 당명을 바꾸는 등, 현 정권과 거리를 두기 위한 갖가지 기괴한 행동을 취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이긴 정당이 이명박 정부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집권당이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보면, 그 집권당의 승리는 결국 현 정권의 연장을 다수 국민이 지지하거나 적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게 옳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석이 논리적으로는 옳을지 모르지만, 전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의 권력남용과 타락은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컸다. 그것은 집권당 스스로도 인정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집권여당은 마치 현 정부의 과오에는 별 책임이 없다는 듯이 기묘한 변장술(變裝術)을 구사하며 선거에 임했고, 그 변장술의 효험인지는 몰라도 결국 이겼다. 그럼으로써 실패한 정권의 책임을 묻는 투표행위, 즉 대의제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갖는 가장 일차적인 의의가 증발해버렸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의 정치현실이 대의제민주주의의 기본원리마저 작동하지 않는 기이한 상황임을 말해준다.

선거가 끝나자 이런저런 해설과 논평이 쏟아지고 있다. 종합하면, 여권이 보수층을 총집결하고 온갖 영악한 책략을 써서 성공한 반면에 야권은 단결력에서도, 수권(受權)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논리의 설파에서도 미약했다는 게 요지이다. 결국 실력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주류 언론과 제도권 교육 그리고 수많은 국가기관이 대자본과 보수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철저히 장악·통제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소위 민주개혁 세력을 대변하는 야권이 절반 가까운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패배라고 할 수는 없다.

충격적인 실패

하지만 역시 충격적인 실패였다. 이것은 정권교체에의 열망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모른다. 몇 달에 걸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정권교체를 바라는 비율은 늘 압도적이었다. 그런데도 선거 결과는 그 반대로 나왔다. 이 기이한 불일치는 야권의 논리와 행동이 유권자들을 움직일 만큼 결정적인 설득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빼고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충분한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단적으로, 야권의 주요 정책공약이 여당 측의 것과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과 직결된다.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나 일자리 및 복지시스템 확충과 같은 여야 공통의 핵심적 공약에 근본적인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들도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권교체라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은 도전자로서는 결정적인 실격 요인이었다. 선거기간 중 여러 차례 원로 논객들이 야당 후보 측에 대하여 더욱 ‘담대한’ 발상과 자세를 보여줄 것을 요청하는 공개 발언을 행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밀히 보면 여야의 공약에는 본질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차별성이 엄연히 존재했다.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라는 핵심 공약만 해도 그렇다. 여당 후보는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이른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가 ‘경제민주화’와 다르지 않다고 발언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앞으로도 대기업 위주 경제시스템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 것인지 모른다. 사실, 자신이 5년 전에 들고 나왔던 ‘줄푸세’라는 공약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논리에 근거한 착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세계경제가 파국에 직면한 지금, 그것을 다시 들먹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숙한 판단력(혹은 판단력 결핍)의 소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논리의 유효성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믿음을 토로하는 이 대목은 딱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비단 경제공약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4대강 문제나 에너지, 특히 원자력 문제에 대해서도 여당이 침묵하거나 모호한 태도로 일관한 것과는 달리 야당은 비교적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주요 하천이 썩어가는 물로 된 거대한 수로와 호소(湖沼)로 변해버린 끔찍한 현실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약속하고, 원전 문제에 대해서는 수명이 끝난 원전은 연장 가동을 허가하지 않고, 신규 원전 건설도 중지할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약속은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합리적인 공약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이러한 정책의 차이를 끝내 날카로운 쟁점으로 만들지 못했다. 선거가 있어서 좋은 점의 하나는 그 기간 동안에 사회의 주요 이슈가 날카로운 쟁점이 되고 활발한 토의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지금 어떤 현실에 자신들이 처해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 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함께 나누고 삶의 공통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보다 성숙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의 성립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선거 결과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여당 측의 토론 기피증에다가 야당의 무기력함이 더해져서 이번 선거기간은 심각한 쟁점을 둘러싼 토론다운 토론 하나 없이 허비되고 말았다. 물론 도전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과감성을 보여주지 못한 야당의 책임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야당의 이 과감성 부족의 원인은 무엇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상상력의 부족에 있는 게 아닐까?

왜소화된 경제민주화

우선 이번 선거의 최대 화두였던 ‘경제민주화’를 생각해보자. 물론 현재 한국사회에서 긴급한 현안의 하나는 재벌의 전횡을 제어하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선출된 권력도 아니면서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와 국가기구, 언론과 대학, 교육과 문화예술 등 온갖 영역에 걸쳐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재벌의 특권적 지위를 이대로 방치하고는 민주주의의 필연적인 붕괴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여야가 공히 내세운 경제민주화 공약은 재벌에 의한 이러한 전방위적 지배구조의 해체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오너’가 부당하게 누리고 있는 몇몇 특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을 기본적 정책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수준의 ‘개혁’도 서민경제의 회복에 기여하는 바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의 ‘황제경영’ 방식을 문제삼는 것 정도가 경제민주화로 불린다면, 그것은 터무니없이 왜소화된 경제민주화일 수밖에 없다.

원래 경제민주화란 매우 단순한 발상에 기초한 것이다. 즉, 빈부간의 극심한 격차, 즉 사회 구성원 사이의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하기는 경제적 불평등이란 사유재산 제도 성립 이후의 문명사회 어느 곳에서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과도한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이다. 그것은 사회적 안정성을 근저로부터 위협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정치적 민주주의마저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근대 국민국가는 본래 여하한 개인이나 집단에게도 사회적 특권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대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린다는 기본전제 위에 성립된 정치체제이다. 그러한 사상·이념이 바로 국민국가의 역사적 선진성과 정당성의 근거이다. 거기서 국민이라는 개념도 나왔다. 따라서 ‘국민’과 ‘불평등’은 근본적으로 상용(相容)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힘의 격차에 의해서 어떤 국민이 다른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는 어디까지나 노예사회이지 원래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체제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국민국가는 한 번도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해본 적이 없다. 국민국가는 시초부터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균열과 모순을 껴안은 채 전개되어왔다. 이것은 물론 근대 국민국가의 물질적 기반이 사회적 불평등 없이는 단 한순간도 존속할 수 없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경제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경제에서 사회적 격차는 시스템 자체가 돌아가는 데 불가결한 요건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확대·팽창은 곧 격차사회의 심화를 뜻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정도 문제이다. 자본주의체제일지라도 어떤 단계까지는 국민국가의 평등 이상이 언젠가는 현실화될 것이라는 희망 혹은 환상이 완전히 꺼지지 않을 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환상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근거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두 세기 반에 걸친 자본주의 논리의 거침없는 폭주의 필연적 귀결로서의 극단적인 비인간적·반자연적 체제이다. 지금은 국민국가의 틀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계 전역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글로벌 자본의 시대이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은 “상인에게는 조국이 없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이 국민국가에 대해서 갖는 관계를 이보다 더 간명하게 요약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글로벌 자본뿐만 아니라, 원래 자본이라는 것에는 애향심이나 애국심이 있을 수 없다. 돈이 된다면 어디로든 옮겨 다니는 게 자본의 근본 성향인 이상, 특별한 애착이나 귀속감을 느끼는 장소나 공동체가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경제민주화는 대체로 재벌의 막강한 권력행사를 얼마간 완화하는 수단으로서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경제 전체의 균형을 위해서 필요한 대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재벌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국민경제의 테두리를 훨씬 벗어난 글로벌 자본이 되었다는 기본적 사실을 흔히 우리들이 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번역되어 나온 책 《누가 한국경제를 망쳤는가》(미쓰하시 다카아키 지음, 정영태 옮김, 초록물고기)는 이 점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쓴 일본인 경제전문가에 의하면, 외국인 투자가의 지분율이 전체 주식의 절반을 넘은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이미 한국기업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시장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 투자가들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기업을 ‘우리 기업’ 운운하는 것은 확실히 난센스이다. 지금 재벌기업은 국민경제의 차원에서 논할 대상은 더이상 아니다. 그러니까 대기업이 번성하면 저절로 국민의 경제생활이 좋아진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임이 분명하다.

글로벌 자본으로서의 대기업, 희생되는 국민경제

실제로 진상은 그 반대라고 해야 옳다. 즉, 대기업이 국민경제에 이바지한다기보다는 노동자와 서민들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도록 구조화돼 있는 게 오늘날 한국경제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사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는 빈부격차, 비정규직 노동의 급증, 높은 청년 실업률 등은 글로벌 자본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반가운 현상이다. 대기업은 국내시장을 바라보지 않는다. 대기업의 성장은 주로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위해서 국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상승을 원치 않는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면 국내수요가 증가되지만, 국내시장은 대기업으로서는 너무나 협소한 시장이기에 매력이 있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대기업은 한미FTA를 비롯한 여러 자유무역협정을 강력하게 요구해왔고, 그 타결을 열렬히 환영했다.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국가의 경제주권 상실은 대기업과 투자가들이 관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경제에서 노동자 혹은 일반 국민과 수출 대기업 사이의 이해관계 상충은 구조적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의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온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에 의해 오랫동안 직접적으로 제공되어온 특혜이다. 결정적인 특혜는 법인세 인하 및 원화가치 절하정책을 통한 전폭적인 수출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세로 인한 국가예산의 감소는 말할 것도 없이 공공서비스의 축소로 연결되어 일반 국민의 생활에 타격을 가하지만, 원화약세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원화가치 약세 정책으로 석유를 비롯한 수입생필품 가격은 당연히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그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게 마련이다. 실질임금은 끊임없이 바닥으로 향하는데 물가가 계속해서 올라가면 서민경제의 파탄은 필연적이다. 일반 국민의 희생 위에 대기업이 번성하는 메커니즘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전력이라는 핵심적인 산업 인프라에서도 기업은 오랫동안 특혜를 누려왔다. 이것은 기업이 생산비 이하의 싼값으로 전기를 이용하는 대신에 일반 국민은 상대적으로 높은 가정용 전기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이 구조는 지금도 별다른 사회적 저항 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경제의 핵심 문제는 대기업의 수출 실적을 위해서 국민경제의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처럼 일반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실현되는 이익의 큰 부분은 외국인 투자가들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기는 내국인 투자가들이라고 해서 괜찮은 것도 아니다.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오늘날 대규모 투자가들은 자신의 자금을 생산적인 데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단기간에 최대한 금융자산을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익이 예상된다면, 그 결과가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고 세계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일지라도 주저 없이 투자한다. 그리고 이들이 투자한 돈으로 움직이는 기업은 투자가들의 자산 증식 욕구에 부응하여 온갖 비윤리적·반사회적인 행동도 꺼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주가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주가 폭락이며, 그로 인한 궁극적인 파산이다. 그리하여 ‘윤리적 경영’ 혹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경영’이라는 아이디어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헛소리에 불과하다. 임금 삭감,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대 등은 기업이 주가 상승을 꾀하거나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서 행하는 매우 비인간적인, 그러나 가장 흔한 방법이다. 신(新)기술의 도입, 자동화 기계의 설비 등은 보다 세련된 방법이지만, 그것도 결국은 노동자 감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지금 글로벌 자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세계 전역에 걸친 자본의 위세는 너무도 막강해서 국민국가의 공적 권력으로 제어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음이 확실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기업이나 금융투자가들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경유착이라는 진부한 용어로는 제대로 접근도 못할 만큼 정치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전면적인 것이 되었다. 정치뿐만 아니다. 언론, 대학, 교육, 문화, 과학기술 등등, 여론을 주도하고, 사회를 이끄는 온갖 분야의 ‘엘리트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정신을 오염시켜온 것도 자본의 힘이다.

자본의 힘과 국가의 책무

그러나 한계가 있기는 하나, 국가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다. 어차피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자본의 폭주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힘은 국가권력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따져보면 이것은 국가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책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토록 자본이 막강한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했던 장본인이 바로 국가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도움 없이는 성립도, 존속도, 성장도 할 수 없었던 역사이다. 이른바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허구적 관념일 뿐이다. 국가가 온갖 법률과 규제(혹은 규제완화)를 통하여 자본에게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끊임없이 제공해왔던 결과로 자본주의경제는 성장과 확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칼 폴라니가 명확히 지적했듯이, 순수한 시장경제라는 것은 실제로 역사상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시장경제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프로젝트’의 소산이었고,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허구적 논리에 매달려 국가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기보다 무책임한 짓이다. 하물며 국가의 주요 공공자산이나 물, 전기, 가스, 철도 등 국민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공공서비스체계를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시장논리를 들먹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지금은 경쟁력 운운하며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구상할 때가 아니라 다루기 힘든 괴물이 된 자본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어해야 할 때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이지, 더 많은 경제성장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가 처한 복합적인 위기상황, 즉 기후변화 및 농경지 사막화를 위시한 심각한 환경파괴, 석유를 포함한 각종 지하자원의 급속한 고갈, 인구 불균형, 근대적 금융통화제도의 파탄 그리고 사회적 격차의 심화 등등은 예외 없이 오로지 단기적 이윤추구에 골몰해온 자본주의적 성장논리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현실에서 더 많은 경제발전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정부의 역할, 라틴아메리카의 실험

실제로 국가권력이 정의롭게 행사된다면, 자본의 횡포를 제어하고 민중의 이익을 지키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선례가 존재한다. 그 최신의 모범적인 예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오랜 세월 유럽의 식민지로서, 또 독립 후에는 제국주의 자본과 그들의 앞잡이들에 의한 약탈과 착취, 억압 속에서 신음해온 절망의 땅이었다. 그런 사회가 마침내 억압의 구조를 깨고, 지금은 오히려 다양한 혁신적인 사회정책을 과감하게 도입·실험함으로써 자본주의 종말 이후의 세계를 선도적으로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국가에서의 이 엄청난 변화가 예외 없이 선거에 의해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선거라는 것도 제대로만 된다면 훌륭한 사회개혁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사실 지금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보여주는 여러 혁신적인 움직임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상식으로 볼 때, 놀라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출신 룰라가 대통령을 지낸 브라질이나 볼리바르혁명을 제창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의 경우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나라이고,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을 뽑았던 볼리비아도 역시 흥미롭다.

볼리비아라면, 2000년에 대규모 ‘물 폭동’이 일어났던 도시 코차밤바가 먼저 연상되는 나라이다.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에 의해 상수도 사업이 민영화되자 다국적기업은 수원지 확보 공사로 인한 비용부담을 이유로 급작스럽게 수도 사용료를 대폭 올렸고, 이에 따라 코차밤바의 가난한 주민들은 생존에 불가결한 물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다. 심지어는 이 와중에 주민들이 빗물을 받아 쓸 수 있는 권리조차 제한되었다. 이에 견디다 못해 일어난 민중궐기는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는 ‘폭동’ 수준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정부는 민영화를 취소하고, 외국 기업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벌 자본에 대한 이 민중 항거는 결국 몇년 후(2006년) 인디오 혈통의 코카 재배 농민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모랄레스는 “오늘날 인류의 최대의 적은 자본주의이다. 이 자본주의의 최신판인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야만적으로 침해하고 있다. 볼리비아 민중은 체 게바라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 횡포에 대항하여 궐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혁신적 사회개혁운동에서 빠트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의 개혁사상은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에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안데스 토착문화의 세계관·자연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코펜하겐 기후정상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뒤 2010년 4월에 바로 그 ‘물 폭동’의 도시 코차밤바에서 ‘기후변화와 어머니 대지(大地)의 권리에 관한 세계민중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는 그 회의에서 안데스 토착민의 후예답게 ‘자연의 권리’와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다국적기업의 환경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재판소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경우는 에콰도르인지도 모른다. 에콰도르의 ‘사회혁명’은 2006년 경제학자 라파엘 코레아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전 정권에서 경제장관을 지냈던 코레아는 에콰도르 국가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과제가 대외부채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이 외채를 갚기 위해서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이 소비되었다. 실제로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지만, 이 무거운 외채상환 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에콰도르의 만성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거기간 중 코레아는 국가채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자신이 선출되면 이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해소할 것을 약속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즉시 그는 자신의 공약대로 ‘공공채무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지난 30년 동안 독재정권하에서 에콰도르가 빚진 대외채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성격을 면밀히 검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심사위원회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해외의 몇몇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그들도 위원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2년 뒤 제출된 심사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에콰도르의 외채 중 많은 부분이 ‘정당성’을 결여한 부채, 다시 말해서 이전 정권들의 ‘부적절한 통치’와 ‘정치적 부패’에 관계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코레아 대통령은 국내외로부터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정당성이 없는 부채’의 상환은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에콰도르의 국채는 국제 채권시장에서 거의 휴지조각처럼 되었고, 수개월 후 코레아 대통령은 은밀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 에콰도르 채권을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리하여 에콰도르는 외채상환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와 지혜 없이는 안되는 거사(擧事)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에콰도르 정부는 그것을 해냈고, 그 덕분에 에콰도르의 가난한 민중의 삶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었다.

에콰도르의 외채청산, 은행세(稅)와 기본소득

이렇게 해서 여유를 갖게 된 에콰도르 정부는 도로, 병원, 학교 등을 신설·보강하면서 빈곤층의 생활 향상을 위해 집중적으로 예산을 투입해왔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저소득층에게 매월 35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인간발전보너스’라는 시스템이 운영되어왔다. 코레아 대통령은 그 보너스 지급액의 인상을 위해서 2012년에는 새로운 재원 확보 대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에콰도르 국내의 민간은행들을 상대로 한편으로는 종전까지 은행에 주어졌던 소득세 저(低)부담 혜택을 해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의 소득에 대해 3%의 신규 과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은행가들과 보수파 경제학자들로부터의 격심한 반발이 있었지만, 지난 11월 의회에 의해 법안이 가결됨으로써 앞으로 에콰도르의 노인들과 편모들을 포함한 200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은 월 50달러의 현금을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게 가능해졌다.

보너스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이 현금 급부 시스템은 미흡한 대로 일종의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된 논거는 아마도 오래된 고정관념, 즉 소득은 당연히 노동의 대가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의 유효성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앞으로의 세상은 이전과 같이 계속적으로 일자리가 증가하는 성장경제 시대는 아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기계화, 자동화에 의해서 세계 전체 노동력의 20% 미만으로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물자가 생산·공급될 수 있다는 게 오늘날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미 대부분의 노동력은 사실상 잉여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기계화, 자동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산업용 자원을 값싸고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어차피 경제 규모와 산업활동이 갈수록 축소되어 갈 게 확실하다. 실제로 지금도 과잉생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세계경제의 현실이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될 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성장을 기본전제로 해왔던 모든 제도와 관행은 근본적인 재검토를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고용과 소득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고용이 없으면 소득도 없다”라는 관념에 미련스럽게 매달려 있다가는 수많은 사람의 생활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평화롭게 장기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의미에서 에콰도르의 ‘인간발전보너스’라는 프로그램은 매우 선진적인 사회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제한된 사회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틀림없는 기본소득 보장 시스템이다. 그리고 현금 급부 방식을 통한 기본소득 보장은 빈곤문제의 해법으로서도 가장 효과적이라는 게 이미 세계의 여러 지역―남아프리카, 브라질, 인도, 몽골, 등등―에서 입증되었다. 이것은 여러 경제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일찍이 기아(飢餓)와 민주주의가 역비례 관계에 있음을 논증하여 주목을 받은 인도 출신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와 현장체험에 근거하여 국제기구나 정부들이 흔히 행하는 방식, 즉 현물이나 인프라를 원조·제공하는 방법으로는 ‘저개발 사회’의 만성적인 빈곤 구조가 해소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 탈식민화 헌법

그런데 에콰도르의 개혁 중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은 2008년에 작성된 새로운 헌법이다. 이 헌법에는 오랫동안 민중을 억압, 소외시켜온 식민주의와 독재체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나라의 정치적 의지가 강력히 반영돼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당연히 참여민주주의 가치와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새로운 헌법이 ‘좋은 삶’(buen vivir)을 강조하고, 지속 가능한 ‘좋은 삶’을 위해서 ‘자연의 권리’를 명문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물질적 번영 혹은 개인주의적 행복을 중시하는 서구 근대적 의미에서의 ‘잘사는 삶’과는 전혀 이질적인 차원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부의 축적도 성장도 아닌 ‘균형상태’이다. 그 ‘균형’을 위해서는 물론 생존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영양, 건강, 교육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에콰도르의 신헌법은 이러한 민중의 기본적 생존권을 강조하되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개인과 공동체들이 자연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권리’를 명문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에콰도르의 신헌법은 아마도 세계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보적 역사관을 대변한다는 전통적 좌파 세력은 민중의 권리를 강화하는 데는 열성적이면서도, 그 민중의 지속적 생존의 토대인 자연에 대한 관심은 늘 부차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민중의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늘 경제성장을 옹호하고 장려해왔다.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코레아 대통령의 측근이자 에콰도르 신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경제학자 알베르토 아코스타에 의하면, 그러한 좌파의 관점은 간단히 말하면 ‘자폐적 세계관’이다. 실제로 서구 근대문명은 “모든 자연은 원칙적으로 계산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근본 신념 위에서 구축되어왔고, 좌파적 상상력에서도 예외 없이 자연이란 기본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고 이용하는 대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자연관의 연장선에서 미개인, 토착민, 하층민에 대한 식민주의적 지배와 억압이 오랫동안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에콰도르의 새 헌법에서 ‘좋은 삶’ 혹은 ‘자연의 권리’라는 개념이 명문화된 것은 결국 이 지역이 서구세력에 의해 침탈되기 이전의 토착문화의 뿌리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삶’이란 식민주의에 의해 오랫동안 억압돼왔던 안데스문화와 그 생활양식의 복구, 다시 말해서 탈식민화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안데스문화 전통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 하나의 가족이었다. 오늘날에도 안데스 농민사회에는 ‘파차마마’(어머니 대지)가 기축(基軸)이 되어있는 세계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과 의식이 보존되어 있다. 안데스 농민들은 만물을 기르는 ‘파차마마’를 실지로 ‘그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끝없는 공경심으로 돌보는 게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근원적인 삶의 지혜이다. 지금 에콰도르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국민들이 안데스문화의 뿌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근원적인 지혜를 되살릴 필요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근원적인 지혜의 복구는 꼭 라틴아메리카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서―석유의 포기와 자연의 보존

그런데 ‘자연의 권리’를 명시한 이 선구적인 헌법에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에콰도르가 자신의 영토에서 새로이 발견된 유전을 개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다. 에콰도르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원유수출국의 하나로, 국가예산의 40%가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그 석유도 이미 매장량의 절반이 채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2006년에 국영석유회사에 의해 열대우림 지대인 ‘야수니 국립공원’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었다. 매장량 10억 배럴 정도로 추정되는 이 새로운 유전은 나라 전체 원유 매장량의 20%에 상당하는 규모이다.

하지만 ‘야수니 국립공원’은 현재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풍부한 동식물과 새와 곤충들의 서식지로, 아직 훼손·파괴되지 않고 생태적으로 살아있는 희소한 장소의 하나이다. 게다가 ‘문명’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삶터이기도 하다. 이 원시적 ‘낙원’은 석유개발이 시작된다면 곧 파괴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전을 개발한다면 에콰도르의 경제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는 것도 분명했다. 이 딜레마는 당시 석유장관이기도 했던 알베르토 아코스타가 풀어야 할 최대의 숙제였다. 그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정부의 주요 각료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를 에콰도르 신헌법에 도입한 주역이다.

그는 그러나 석유개발로 민중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생활환경이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고, 자연은 무참하게 파괴되어온 역사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써 현대의 석유산업의 본질적인 반민중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에콰도르 민중이 가난한 것은 오히려 석유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풍요의 저주’라고 불렀다.

아코스타는 에콰도르를 포함한 세계 민중의 생활이 지속 가능한 것이 되려면 세계경제가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자연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충실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 유전 개발을 포기하고, 그 대신 세계를 향해서 ‘거래’를 제안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거래 내용은, ‘야수니 국립공원’이라는 생태적 보고를 원상대로 보존하고, 잠재적으로 막대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사전에 차단한 에콰도르의 지구환경 보전정책에 대하여 세계의 다른 정부나 기관, 개인들로부터 상응하는 대가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추정 매장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원유가격, 약 360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목표를 세웠다. 코레아 대통령은 고심 끝에 이 제안에 동의했고, 그럼으로써 에콰도르는 역사상 최초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유전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 국가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 계획을 지지하고 ‘보상금’을 보내온 것은 유엔환경계획을 비롯하여 칠레, 페루,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정부, 개인으로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 미하일 고르바초프, 리고베르타 멘추, 무함마드 유누스 등이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이 계획을 돕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와 국익 논리가 여전히 압도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전대미문의 계획이 순탄하게 전개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보다 코레아 대통령 자신이 스스로 승인한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아왔고, 지금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토 아코스타는 대통령의 이러한 흔들리는 자세 때문에 국제사회가 이 계획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그 결과 계획이 무산될 것임을 우려하고 있다. 2013년 4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다시 후보로 나선 코레아는 현실 속의 정치가로서 목전의 이익이 주는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콰도르의 유전개발 포기 결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사실 장담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인류의 장래에 큰 희망을 주는 신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신문 〈가디언〉 기자와의 회견(2011.8.14.)에서 이 계획의 입안자 알베르토 아코스타는, “우리는 석유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가는 지혜로워야 하고, 사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우리는 자연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자연은 우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녹색국가에의 지혜, 민중문화의 힘

오늘날의 세계현실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인간집단이 과연 ‘지혜로워질’ 수 있는지는 큰 숙제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익숙한 국가는 기본적으로 홉스가 말한 ‘괴물’―즉 인간을 모조리 이기적인 짐승으로 간주하는 인간관·세계관에 토대를 둔, 합법적 폭력기구로서의 국가일 뿐이다. 그러나 에콰도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의 몇몇 혁신적인 실험들은, 국가의 틀을 통해서도 대안적 활로를 모색하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아직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을 때는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실험들은 ‘100% 녹색국가’라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보다 밀도 높은 녹색국가에의 길은 열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신헌법이 명시하는 ‘좋은 삶’이란, 지금 모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대안적인 비젼이다. 서구 근대문명을 뒷받침해온 사상·가치와 신념체계로는 결코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근대문명을 추동해온 자본주의 성장경제 메커니즘은 곧 작동 불능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축소경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꾸려갈 것인가. 에콰도르의 새 헌법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에콰도르의 선구적인 헌법이나 그 헌법정신에 의거한 석유개발 포기라는 경탄할 만한 결정은, 그 사상적 뿌리가 결국은 안데스의 토착농민문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국익보다 민중의 이익을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도 중요하고, 알베르토 아코스타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양심적이고 지혜로운 엘리트의 존재도 중요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오랜 세월 억압되어왔으나 끝내 죽지 않고 지속돼온 안데스 농민문화이다. 그 농민문화 속에 내포된 생태적 지혜와 공생의 기술, 풍요로운 풍속·습관이 없었다면, 국가의 인간화(혹은 녹색화)를 위한 이 모든 혁신적 실험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국가든지 국가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그 사회 저변에서 삶을 꾸려가는 민중 자신의 정신적·문화적 역량과 자질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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