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7호 2012년 11-12월호  인쇄용  

 

  서평| 재난과 구원

  장정일

  데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이 페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년)

 

‘재난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공동체에 닥친 화(禍)를 어떻게 복(福)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지은이가 말하는 재난이란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 체르노빌 핵발전소와 핼리팩스 항구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폭발사고나 시카고 대화재와 같은 대형사고 그리고 현대전의 특징인 가공할 공중공습과 2001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가해진 9·11과 같은 테러를 모두 아우른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지진은 3,000명의 사망자와 2만 8,000여 채의 각종 적물을 불태우면서 샌프란시스코와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때 재난지역의 식료품 가게 주인들은 가게의 식품을 모두 방출했고, 도매 식육업자들은 난민촌에 고기를 보냈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온갖 형태의 자선과 자원봉사가 줄을 이었다.

지진이 있고 나서 몇주 동안,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야영을 하면서,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연대의식과 동병상련을 느꼈다. 지진 이전에 샌프란시스코 사회를 갈라놓았던 빈부 간의 벽은 물론이고, 피부색에 따라 달리 대접을 받았던 인종의 벽마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기간 동안 그곳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말을 걸었고, 덕분에 아는 사람의 소개 없이 모두들 수백 명의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11일 만에 폴린 야콥슨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에 이런 기사를 썼다.

우리의 상실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다. 그것은 황금시대에나 있을 법한 우애의 분위기다. … 모두들 당신의 친구가 되고, 당신은 또한 모두의 친구가 되었다. 고립된 개인적 자아는 죽고, 사회적 자아가 군림했다. 새로운 도시에서 사방의 벽이 다시 우리 방을 둘러치더라도, 우리를 차단시켰던 예전의 외로움을 다시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지진과 화재가 주는 달콤함과 반가움이다. 용감함도 강인함도 새로운 도시도 아닌, 새로운 연대의식이 주는 기쁨이다. 다른 인간에게서 느끼는 기쁨.(57쪽)

모든 재난에는 고통이 있고, 아비규환의 순간이 지났을 때 받는 정신적 충격이 있으며, 육체적·물질적 상실이 따른다. 그러나 폴린 야콥슨의 기사는 재난의 한편에는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그리고 기존 질서 속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지은이는 재난을 맞아 낯선 사람과 연대하고 우정을 나누는 이런 고양된 순간에 ‘재난의 공동체’ 또는 ‘재난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그런 성화(聖化)는 시공을 가리지 않고, 재난이 덮친 모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난 지 거의 100년이 될 즈음, 샌프란시스코의 반대쪽인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으로 가보자.

3,000명의 사망자를 낸 9·11테러는 그 즉시 수백만 명의 대피자를 냈지만, 그와 동시에 수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끌어들였다. 343명이나 되는 소방관의 숭고한 죽음에 가려 빛이 바래긴 했지만, 세계무역센터가 공격을 받은 직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빌딩으로 진입한 자원봉사자도 많았다. 그저 무엇이든 돕기 위해 세계무역센터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잡석더미를 헤치고 사망자를 수색하는 일에서부터,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4년 ‘자유의 여름’이라는 민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템마 캐플런은 자신의 자원봉사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9·11에 나는 우리에게 공동체가 남겨졌다는 것, 사람들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음을 여전히 믿는다는 것, 우리가 계속 전진할 수 있으며, 또 계속 전진할 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모두가 서로를 지탱하고 끌어안기 위해 서로를 붙잡고 있다는 것도요. 그건 무서우면서도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아주 드물게 느꼈던 집단의식을 그때 느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감정은 늘 엄청난 공포에 직면했을 때 느꼈죠. 9·11 직후 처음으로 며칠간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우리가 민권운동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느꼈어요.(298~299쪽)

재난이 발생하면 몇분 안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응급처치소·병원·구호센터·교류센터로 몰려들고, 부탁하지도 않은 장비와 의류·식품·침구 같은 물품이 산더미같이 모이는 집결 현상은 꽤 오래전부터 목격되어왔다. 지은이는 그런 현상을 포함한 재난 연구의 물꼬를 튼 사람으로 찰스 E. 프리츠를 꼽는다.

사회학 학위를 받고 미 육군 항공대 대장으로 1943년에서 1946년까지 영국 전역의 공군기지에서 근무를 한 그는, 전후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소에서 공습이 민간인에게 끼친 영향이나 핵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민이 보일 태도에 대해 연구하면서, 재난 연구라는 생소한 분야를 개척했다. 그가 막 연구를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군사 관계자나 민방위 담당자들에게는 재난이 벌어지면 대중들에 의한 공황과 사회질서 붕괴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까지 엘리트 계층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귀스타브 르봉 탓이 크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몇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는 《군중심리》에서 군중은 이성적인 개인과 달리 본능과 선동에 따라 행동하는 야만인일 뿐이므로, 두려움과 생존욕에 압도된 나머지 반사회적인 범죄와 흉포한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리츠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일상적 삶 자체가 일종의 꽉 막힌 재난일 때 실제 재난은 일상적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주며, 실제 재난은 개인주의로 형해화된 현대사회에 공동체적 일체감을 회복시켜주는 계기가 된다는 전복적인 결론을 내어놓았다. 1960년대에 작성된 한 보고서에서 그는 “재난이 닥치면 대중은 공황과 광란에 빠져 우르르 몰려”다니며 “서로를 짓밟고 동료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거나, “어떤 이들은 약탈과 도둑질 또는 다른 형태의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행동으로 눈을 돌린다”는 기존의 선입견, 또는 “재난의 여파는 광범위한 비윤리성과 사회갈등, 정신이상”(165쪽)이라는 엘리트 계층의 고정관념을 이렇게 반박했다.

많은 사람이 위험과 상실, 박탈을 함께 겪음으로써, 사회적 고립을 극복한 생존자들 사이에 친밀하고 집단적인 연대감이 생기고, 친밀한 소통과 표현의 통로가 샘솟는다. ‘외부인’이 ‘내부인’이 되고, ‘주변인’이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전에 없던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기본적인 가치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을 유지하려면 집단행동이 필요하며, 개인과 집단의 목표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음도 깨닫는다. 개인과 사회적 필요의 이러한 얽힘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했을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167쪽)

그 시기에 진행된 상당부분의 연구가 여전히 기밀로 분류되어 있다지만, 프리츠의 연구는 재난 연구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가 열어놓은 재난에 대한 긍정적 관점은 인간 본성을 신뢰하는 것과 동시에, 재난이 사회의 여러 당사자가 권력과 정당성을 놓고 경쟁하는 쟁탈의 장일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을 낳았다. 하므로 폴린 야콥슨과 템마 캐플런의 성화된 경험담은 잠시 잊도록 하자.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에 ‘차카게’ 대처하는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 교본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다.

 

재난 현장의 정치역학

앞서 본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9·11테러의 예로부터, 재난의 공동체 혹은 재난 유토피아가 작동하는 원리를 얼핏 볼 수 있었다. 그 원리의 핵심은 국가보다 더 기민하고 관용적인 우애를 갖춘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상호부조였다. 하지만 국가나 엘리트는 재난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민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를 반기지 않는다. 지은이는 구체적인 사례로 2005년 뉴올리언스를 초토화시킨 카트리나 사태를 든다.

뉴올리언스의 80%가 침수되면서 사망자만 600명 이상을 낸 카트리나 사태 때, 주(州)정부나 시는 경찰과 주(州)방위군으로 이루어진 긴급구호대원들에게 수색과 구조 활동을 접고 약탈과의 전쟁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 경찰과 주방위군은 구조나 구호를 받아야 할 수해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했고, 뉴올리언스는 재해지역이 아니라 거대한 감옥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랫동안 범죄율이 높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해 기간 동안 뉴올리언스의 범죄율은 평소보다 더 높아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 유수 언론매체들은 마치 뉴올리언스가 살인과 약탈로 날밤을 지새우는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의 무대이기나 한 듯 떠들었다. 그러나 살인과 약탈은 경찰과 백인 자위단에 의해 벌어졌고, 거기에 뒤따르는 알맞은 조처로 전국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의 재해지역 출입이 금지됐다.

정부와 경찰이 피해민을 구제하기보다 적대시하고, 재해 현장과 자원봉사자 사이의 연대를 끊으려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즉석 급식소를 꾸리고 재건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산된 탈중심적 의사결정체계의 생동성을 입증한다. 시민들은 말하자면 정부의 기능을 하는 임시 의사결정조직을 스스로 구성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늘 약속해왔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재난에서는 마치 혁명 직후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453~454쪽)

요약하자면, 재난은 ①정부와 엘리트들이 구축해온 시스템의 결함을 보여주며, ②그로 인해 자신이 행사해온 권력의 정당성이 도전받게 되고, ③있으나마나 한 정부와 엘리트를 대신한 기민하고 효율적인 시민사회가 혁명적 상황인 양 현장을 접수하게 된다. 그럴 때, 재난 현장을 장악하거나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는 전복되고 엘리트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231~232쪽).

반면, 재난 현장을 장악한 채 국가나 엘리트가 하지 못한 재난 구호에 성과를 낸 시민사회의 갖가지 공동체는 재난이 종료하고도 재난 현장에서 닦은 경험이나 연대를 또다른 형태로 지속하거나 확장한다. 이때 재난은 시민들에게 시민의 주체성과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하는 훈련장이 되고, 재난 현장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짧은 유토피아”(459쪽)를 세상에 창조할 방법을 찾게 된다. 잠시 잊자던 폴린 야콥슨과 템마 캐플런의 성화된 경험담은 ‘섬광 같았던 유토피아의 기억’에 불과하지만, 정부와 엘리트는 시민들의 이런 각성을 두려워한다. 지은이는 그들의 이런 두려움에 ‘엘리트 패닉(elite panic)’이라는 명칭을 달아준다.

멕시코 시민사회는 1985년 멕시코시티를 강타한 지진 재해가 끝난 뒤에도 재난 시에 맛본 ‘재난 유토피아’를 잊지 않음으로써, 1926년 이래 제도혁명당이 독식해온 단일정당 국가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또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 사고는 표현의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5년 뒤에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보다 개혁·개방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재난은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며, 재난 중에는 빈번해진 권력투쟁 가운데 “진정한 정치적·사회적 변화”(40쪽)가 생겨날 수 있다. 한마디로 재난은 ‘권력자/당국/제도’와 ‘민중/시민사회/공공성(사회정의)’이 권력과 정당성을 놓고 싸우는 경쟁의 장이다.

때문에 정부나 엘리트는 재난의 의미나 현장의 주도권을 시민들의 연대나 자생적으로 생겨난 공동체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미국정부와 언론의 사명을 저버린 유수의 언론은 카트리나 사태의 현장인 뉴올리언스를 흑인과 빈민의 약탈장으로 상징·조작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재난이 시민들의 연대와 각성의 장으로 성화하는 것을 원천 차단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앞선 9·11 당시엔 어땠던가?

우선 뉴스 제작자들은 9·11사태에 대한 대응을 다룰 때, 중요한 일은 죄다 남성적 영웅이 해결하는 재난 영화처럼 묘사했다. 즉 세계무역센터의 생존자를 구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동성애자들, 나이 든 여성들, 하시디즘 유대교도들, 노숙자들, 운전자들 등 여느 재난에서와 마찬가지로 온갖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인터뷰에 초대받은 사람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거나 특별난 전문가들이었다. 더욱이 테러에 실패하고 펜실베이니아에 추락한 UA 93편의 경우, 납치범에 대항해 싸운 비중 있는 인물들 중에는 여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모두 남성의 것으로 연출됐다. 이런 면밀한 조작을 통해 미국은 ‘남성다움’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애국주의와 전쟁의 광기로 연결됐다.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초유의 사태 앞에서 부시 행정부는 테러리즘에 반대하고 중동정책을 재고하며, 석유산업이라는 더러운 구덩이에 빠진 미국 외교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이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심초사한 부시 행정부는 국민이 광장이 아닌 집 안에 머물기를, 경기 부양을 위해 쇼핑을 하기를,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능력과 과오를 감추기 위해 온갖 매체를 동원해 애국주의와 소비주의라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미국은 본토가 공격당한 초유의 재난을 사회적 재탄생의 기회로 변환시키는 일에 실패했다. 9·11로 공황에 빠진 것은 대중이 아니라 엘리트였으나, 시민사회는 세계무역센터에 몰려들었던 며칠 동안만 승리했을 뿐, 곧 “정부가 말하고 대중매체가 되풀이한 익숙한 이야기들 앞에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342쪽)

레베카 솔닛은 재난 시에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면서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향해 나아가는 다수와 냉담함과 이기심으로 2차적 재난을 부르는 소수”(202쪽)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재난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거나 자선을 통해 연대의식을 나누는 사람과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자선에 냉소적인 사람 사이에는, 홉스와 크로포트킨으로 대별되는 정치철학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고 말한다. 이런 대별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한 홉스와 달리, 크로포트킨은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와 협력이 생존의 필수’임을 천명했다. 지은이는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상상하지 못하는 엘리트 패닉에 대해 부연하면서 “엘리트 패닉은 모든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투시하는 권력자들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경쟁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높이 올라갈수록 이타주의가 사라진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시베리아에서 크로포트킨이 발견한 사실보다는 사회적 다원주의의 시나리오에 훨씬 더 가까운 드라마를 펼친다”(201쪽)고 썼다.

 

홉스에서 크로포트킨으로

이 글의 첫머리에 지은이가 가리키는 재난의 종류로 자연재해·대형사고·전쟁과 테러를 들었지만, 이제 와서 말하자면 2010년에 출간된 이 책은, 세계적 경기침체와 한때 우리나라가 겪었던 국가파산(구제금융)도 재난의 범주에 넣는다. 이미 보았듯이, 재난을 화가 복으로 전화되는 계기로 간주하는 지은이는 이 위기 역시 사회적 재탄생의 기회로 본다.

물론 경제위기는 가혹하지만, 분권화와 민주화, 시민의 참여, 새로운 조직들과 대응 방식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이런 것들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평소에 재난 준비를 더 심도 있게 한다면, 우리사회는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재난 유토피아의 사회, 다시 말해 더 유연하면서 즉흥적이고, 평등주의적이고 위계적이지 않으며, 모든 구성원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기여할 여지가 많아지고 소속감이 커지는 사회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457~458쪽)

순진소박한 언명으로 보이지만, 지진이나 테러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건 없는 상호부조를 나누었다면, 경제적 재난 앞에서는 주저할 게 없지 않은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재난으로부터 정부와 정책의 조직적·행정적·도덕적 결함을 간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일테면, 친재벌 정책과 사회양극화의 위기 끝에 우리나라에서 싹트고 있는 경제민주화 요구는 더 뜨겁게 불붙어야 한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의 정치학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이 독후감에서는 재난의 정치학에 대한 짧은 역사와 정치철학적 배경 그리고 그것이 현실 정치에 적용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 이 책을 읽으면 재난의 현장에 왜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인들이 안전모나 우비를 입고 부리나케 출동하는지 알게 되고, 재난에 직면하여 왜 책임을 덤터기 씌울 사회적 희생양 찾기에 급급해하는가도 깨닫게 된다. 옛날 중국의 황제들이 천재지변에 무능하면 왕위를 내어놓아야 했듯이, 재난 관리에 실패한 오늘의 정치권력자도 정권을 넘겨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아울러 이 책은 전두환―노태우 군부와 보수 엘리트 인사들이 레베카 솔닛이 말하는 ‘재난 유토피아’와 거의 동의어인 최정운의 ‘절대적 공동체’가 80년 광주에서 성화된 것을 부정하고 ‘폭도설’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정치철학적 배경과 정치전략도 훤히 짐작하게 해준다.

이 책이 속할 재난 연구나 재난의 정치학은, 맹목적인 합리화(근대화)가 세계를 일상적인 위험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다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번 책이 갖고 있는 주제의 성격상 레베카 솔닛은 천재(天災)와 인재(人災) 사이의 연관성을 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울리히 벡은 근대의 과학―기술적 합리화가 자연을 적대하고 착취한 결과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조차 인간의 작위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재난/위험을 해결하는 정치적 접근법으로 택한, 국지적이면서 횡적인 연계를 가진 자발적 공동체(레베카 솔닛)와 공식 정치에 대항하는 하위정치의 확장 필요성(울리히 벡)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장정일 ― 시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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