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6호 2012년 9-10월호  인쇄용  

 

  책을 내면서

  김종철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이 할매는 욕심 없읍니다. 오직 요대로 살다가 죽도록 해주십시요.”

“우리는 요대로만 살고 싶습니다. 보상을 더 받을려고 공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 땅값 하락과 생명에 지장을 주는 전자파의 위험에서 제발 살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현명하신 재판장님,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 이 노파는 81세된 할머니입니다. 너무나 억울함을 금할 길 업서서 거칠한 글이나마 펜을 들었습니다. … 내 생명을 연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잘 살아가고 있는데 안이 이게 왠 날벼락입니까. 이 푸른 숲으로 유명한 화악산에 고압 송전탑이 왠 말입니까. … 이렇게 무참히 재산을 강탈당하고, 너무너무 억울한데 누가 누구를 손해배상하라고 합니까. … 정부는 국민과 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닙니까. … 한이 맺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판사님, 난데업시 고압 철탑이 웬 말입니까. 나는 피땀 흘려 가꾼 이 논밭과 우리 목숨을 철탑과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철탑을 세울 겁니까. … 우리는 보상도 필요업고 옛날처럼 밭에 채소 일구면서 이대로만 살게 해주세요. 부탁하옵나이다.”

 

이 절절한 애소(哀訴)는 지금 밀양에서 고압 송전탑 공사 때문에 삶의 근거를 잃게 된 주민들이 법원 앞으로 보낸 탄원서의 발췌 부분이다. 탄원서는 이들이 공사를 방해했다고 해서 전력회사 측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한 당국의 의도는 뻔하다. 그것은 저항하는 주민들을 겁박하여 공사를 강행하기 위한 상투적인 책략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평생 땅을 일구며 오로지 정직하게 땀 흘려 삶을 이어온 밑바닥 백성들을 향하여 이런 책략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이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도리를 생각할 줄 아는 사회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기는 애초에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일 따위는 생략한 채 송전탑 공사를 밀어붙인 전력당국도 주민들의 저항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받고 고분고분 물러설 주민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결국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될 것이라는 데에 그들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년간 반복되어온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금년 1월 6일 고압 송전탑 건설현장에서 자신의 삶의 근거 자체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 70대 농민이 분신자살한 이래 지금까지 밀양 현장에서는 수십 차례의 항의집회가 열리고, 피해를 입게 된 주민들 ―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 ― 자신에 의한 필사적인 저항이 계속되어왔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고령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이 풀뿌리 백성들이 요구해온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탄원서의 문장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제발 이대로 살게 내버려달라”는 절규였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백성들의 간절한 요구는 외면하는 게 국가의 뿌리 깊은 체질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국가 존립의 중심축이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서 돌아가기 시작한 이래 근대국가의 대민(對民)정책은 일관되게 강탈정책 아니면 기민(棄民)정책이었다. 물론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회에 따라 얼마간 정도의 차이나 편차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만 그 강탈 혹은 기민 정책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냐에 따른 차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용산참사에서 시작하여 제주도 강정마을 파괴, 팔당 유기농단지 해체, 4대강공사에 의한 이 나라 주요 강과 농지의 대대적 훼손, 다양한 형태의 인권 유린과 공권력 남용 등등, 이명박 정부 4년간 우리가 진절머리가 나도록 보아온 것은 국가공권력의 이름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마구잡이로 자행하는 야만적인 폭거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이명박 정부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아무런 여과장치도, 중간과정도 없이 국가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힘없는 백성들에게 난폭하게 휘둘러왔다는 점이다.

이 비례무도(非禮無道)한 상황이 정권교체로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근대국가의 근저에 박혀있는 뿌리 깊은 모순, 부조리, 불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작가로서의 생애 내내 번민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 근대국가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체제변호론자들은 교활하게도 “대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려고 해왔고, 지금도 이 논리는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국가는 이 근본적으로 불의(不義)한 논리를 법제화해왔고, 그 결과 법치주의라는 미명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뿌리째 거덜 내는 행위를 끊임없이 비호해왔던 것이다. 이른바 ‘국익’ 혹은 ‘공익’을 위한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국가권력은 본시 우리가 인간으로서 불가피하게 지니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과 비속한 감정을 기회 있는 대로 이용하려 한다. 예를 들어, 독도문제만 해도 그렇다. 독도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영토문제란 본질적으로 이성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정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생활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가의 논리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의 논리 바깥에서 영토문제가 존재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도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가리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우여곡절을 무시하고, 일본이 여전히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 짓고, 그 결과에 따른 전후의 국제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미국과 일본이 합의한 내용에 독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1905년의 일본정부의 결정은 국제법상으로 그대로 유효하다는 게 그들의 기본 논리이다.

이러한 일본 측의 논리는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국제법을 운위하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무시하는 것도 어렵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영토문제는 세계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욱이 일본인에게는 단순히 영토문제일지 모르지만, 한국인에게는 독도란 기본적으로 ‘역사문제’라는 점도 문제를 더 까다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현재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이지 시끄러운 상황을 조성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의 외교행위에 관한 이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국가권력을 장악한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이명박은 느닷없는 독도행을 결행했고, 그 결과로 한일 양국 사이에 준전시(準戰時) 상황을 만들어놓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나라 사이는 물론,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이번 사건은 회복하기 쉽지 않은 손상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수세에 몰린 통치자가 민족주의 감정이라는 폭발성이 강한 대중적 정서를 이용하여 자신의 개인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치행위가 그들이 즐겨 말하는 ‘국익’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계기 때마다 ‘국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분별없는 바보가 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근대국가라는 비인간적 시스템이 계속되거나 확대되는 것은 결국 그 시스템의 희생자들 자신이 거기에 알게 모르게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본주의 근대국가의 틀 이외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당연히 있다.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돈과 권력이 아닌 어떤 것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무상의 행위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여, 환대, 우애의 행동 속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행동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끊임없이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것을 의식화하고 새로운 삶의 원리로 확대·구축하려는 노력이다.

독도문제로 한일 양국이 살벌한 언어를 교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인상적인 발언이 나왔다. 그것은 현재 일본에서 진보파 저널리스트, 에세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라는 한류(韓流) 팬이 최근 어떤 정기간행물을 통해서 한 말이다. “다케시마(독도)니 뭐니 하는 것은 국가의 논리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우리 여성들은 그런 것에 관심 없다. 우리는 그냥 한국산 김치가 맛있으면 ‘아, 김치 맛이 좋구나’한다.” 결국 국가를 중심으로 맴도는 남성적 논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과 같은 정신적 빈곤이 만연한 사상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깊이 음미해봐야 할 발언임에 틀림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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