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6호 2012년 9-10월호  인쇄용  

 

  서평| 정치가의 신념과 복지국가

  한승동

 

  데이브 마고쉬 지음, 김주연 옮김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낮은산, 2012년)

 

얼마 전 서울에 와 있는 토론토 출신 캐나다 언론인(29)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토미 더글러스(1904―1986)를 아느냐고 물어봤다. 즉각 ‘베스트 캐나다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바로 ‘좋은 캐나다’를 만든 장본인이고 지금의 보수당 정부가 그걸 망치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나쁜 캐나다’로 몰아가는 게 혹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냐고 했더니, 그건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했다. 미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게 1989년이고, 멕시코까지 넣어 NAFTA를 체결한 게 1992년이니까 대충 그 얘기와 맞아떨어질 것 같다.

신통하게도 그는 우석균 ‘건강과 대안’ 부대표가 캐나다 언론인 출신 작가 데이브 마고쉬가 쓴 토미 더글러스의 전기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원제 Tommy Douglas: building the new society)의 한글판 해제에 써놓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얘길 했다. 해제에서 우 부대표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를 통해 캐나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토미라는 사실을 알았고 세계의 무상의료 도입 과정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토미에 관한 〈식코〉의 내용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나이 29살이면 1983년쯤 태어났겠고, 토미가 세상을 떠난 건 그가 3살 때쯤이겠다. 토미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건 1979년이었으니, 토미를 직접 체험할 수 없었던 그 캐나다 청년이 토미를 그렇게 기억하는 건 그에 대한 캐나다사회의 전반적인 평가를 반영하는 것일 게다.

토미의 정치 이력 말년에 찰스 린치라는 정치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단다. “캐나다를 서구세계에서 사회주의정책이 가장 잘 실현되어 있는 나라로 변모시키는 데 더글러스는 다른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그렇게 큰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캐나다에 사회주의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짝처럼 우리에겐 비칠지 몰라도, 좌우간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이제서야 사람들은 토미가 이룩한 변화의 의미를 알아차린 걸까.

 

‘날뛰는 코끼리 앞의 닭’

캐나다인들에게 왜 토미라는 지방 정치인이, 심지어 죽은 뒤에도 그토록 인기가 있을까? 그는 연방 하원의원으로도 긴 세월 봉직했지만, 복지사회 캐나다의 이상을 설정하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대안사회, ‘또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꾼 것은 자신의 지역구인 중부 대초원지대 서스캐처원주(州) 집권당 대표로서 그 주지사로 있을 때였다. 따라서 토미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기억과 평가는 17년에 걸친 그의 서스캐처원 주지사 재직기간에 쌓아올린 업적에 크게 기대고 있을 것이다.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또 나중에 전국적인 정당 신민당 당수로서 중앙 정치무대에서 수행한 역할도 과소평가해선 안되겠지만.

토미가 추구한 ‘새로운 사회’, ‘또다른 사회’는 어떤 사회였나?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난한 이주노동자 집안 장남으로, 침례교 목사였던 토미가 젊은 시절 정치판에 뛰어들 때 결성된 ‘협동연방당(CCF: 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지금의 캐나다 제1야당 신민당의 전신)’이 1933년 7월 제1차 전국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리자이나 선언문’은 그 윤곽을 이렇게 그렸다.

우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질서 위에 선 지금의 자본주의체제와 그 속에 내재돼 있는 불의와 비인간성 그리고 경제계획으로 규제되지 않는 민간기업활동과 경쟁을, 경제적 평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민주적 자치를 실현하는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현재의 질서는 부와 기회의 심각한 불평등, 혼란스러운 낭비와 불안정 그리고 풍요의 시대에 다수의 민중을 가난과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가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갈수록 권력은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의 금융업자들과 자본가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고, 그들의 탐욕스러운 이윤추구 앞에 다수는 끊임없이 희생당하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주된 경제행위의 동력이 되는 경우, 우리사회는 투기꾼들과 폭리를 취하는 자들에게 큰 이익이 돌아가는 불안정한 번영의 시기와, 보통사람들의 위험과 고통이 커지는 파멸적인 불황의 시기 사이를 오가게 된다. 이와 같은 악습은 계획되고 사회화된 경제를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 사회는 우리의 자연자원과 주된 생산과 분배 수단을 민중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회다.

 

계획경제와 생산·분배수단의 공유화(사적 소유 배제 내지 통제). 명백히 사회주의체제 또는 그 유사 체제다.

선언문 서문 속의 암울한 당시 사회 풍속도는 지금과 많이 닮았다. 80년 전의 캐나다, 아니 당시 자본주의사회 전반의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시장의 지혜’와 ‘자유기업’이라는 말은 그때도 “협잡”에 지나지 않았다. 토미는 시장과 기업의 자유가 우선한 그때 상황을 “코끼리가 한 무리의 닭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알아서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로 압축했다. 힘없는 닭들의 자유는 고작 날뛰는 코끼리 발에 밟혀 죽지 않으려면 각자 알아서 피해도 괜찮다고 보장하는 자유였다.

그때는 대공황 시기였다.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경제를 괴멸상태로 몰아갔고 캐나다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대규모 밀 경작에 의존하던 캐나다 중부 초원지대는 밀 가격 폭락으로 농가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그들의 땅은 돈을 빌려 주거나, 약자들의 비참을 떼돈 버는 투기의 장으로 활용한 은행 등 금융업자들 손으로 헐값에 넘어갔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굶주린 농민들이 남부여대의 남루한 몰골로 살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때 세계 최대의 밀 경작지였던 서스캐처원 등의 광대한 캐나다 밀 경작지들은 먼지폭풍 몰아치는 사막지대로 변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대공황에 직격당해 지옥으로 변해가던 오클라호마주 등 미국 남중부 농경지대 농민들의 참상과 흡사했다. CCF가 결성된 1933년이면 미국에선 케인즈주의적 처방인 뉴딜정책이 시작됐고 천민 신세가 된 오클라호마 농민들은 살기 위해 그들을 촌놈 ‘오키’라며 천대한 캘리포니아로 몰려갔다. 캐나다엔 뉴딜도 없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보수 집권당은 뉴딜 전의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처럼 공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물자의 절대부족이 아니라 과잉생산, 과소소비가 부른 대공황은 그야말로 인재였다.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2008년 금융공황 역시 80년 전처럼 월스트리트 금융가에서 시작됐다.

공적 자금이란 이름의 엄청난 국민세금 투입으로 당장의 전면 파산은 면한 듯이 보이지만 그리스, 스페인 등의 재정위기로 상징되는 유로경제권의 위기와 그 연쇄파장은 공황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운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한 자본주의체제 위기가 해소된 것은 뉴딜이 아니라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6년간 대량파괴와 살육의 참화가 이어진 2차 세계대전 덕이라는 분석도 있다. 서방이 대체로 통제할 수 있는 이라크와 아프간, 리비아, 시리아의 분규는 국지전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만, 근대 이후 요지부동이던 서방의 패권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 중국과 동아시아의 발흥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 미국이 아시아로의 복귀를 얘기하고 중국 포위망을 강화하면서 동아시아의 옛 냉전적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냉전 구도가 짜여지고 있는 상황은 몹시 불길하다. 최근 동·남중국해 섬들과 독도, 센가쿠(중국의 댜오위다오), 쿠릴열도 4개 섬(일본의 북방영토)을 둘러싼 갈등 고조와 동아시아 각국 내셔널리즘 및 호전적인 우파들의 득세 조짐은 예사롭지 않다. 2차대전 이후 굳어진 팍스아메리카나 체제의 해체와도 얽혀있는 지금의 자본주의체제 위기도 결국 끔찍한 세계전쟁을 통해 해소될까.

 

기독교 정신과 사회주의

약국 사환,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면서 보이스카우트, 연극 활동도 하고 서스캐처원주 인근 매니토바주 아마추어 권투 라이트급 챔피언 자리에도 올랐던 토미는 열심히 책도 읽었다. 어렵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보적인 브랜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토미가 목사로 파견된 곳이 서스캐처원 웨이번의 캘버리(갈보리) 침례교회였다. 그때가 바로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인간의 형제애를 키우고, “인류, 특히 가장 불행한 자들을 구원할 사회와 제도를 만드는 것”을 자신의 목회 활동 목적으로 삼고 있던 토미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공황 희생자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희가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해결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기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조처든 취해야만 했다.” “앞으로 종교는 신학의 교리보다는 인간의 사회적 안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 낡은 교리를 주장하는 데는 에너지를 쏟아부으면서 도처에 있는 가난과 불행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면, 우리의 기독교 정신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보수 기독자들에게 그런 생각은 이단이었다. 보수 교단은 계급 구분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이를 통해 부자는 자선을 배우고 가난한 자들은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현세에서의 삶의 조건을 걱정하기보다는 내세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토미를 위장한 공산주의자, 빨갱이로 몰기도 했다. 캐나다도 80년 전에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상 떠나기 4년 전인 1982년에 토미는 이렇게 회고했다. “국민의 경제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 나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美)나 선(善)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보수 목회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하느님의 계획에서 자신들을 언제나 지배하는 자, 배부른 자의 자리에 앉혔다. 그들 자신은 언제나 자선을 배우는 쪽이어야 했다. 그들은 한 번도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쪽에 자신을 세운 적이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가 수입한 기독교는 주로 북미대륙의 그런 낡아빠진 보수 기독교였다. 같은 목회자였지만 토미는 젊었을 때부터 그들의 그런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3년 대공황 한복판에서 CCF가 찾아낸 구원의 돌파구는 바로 사회주의였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1917)이 일어난 지 16년이 지난 그 무렵 사회주의는 세계의 억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여전히 복음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식민지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세력의 주류도 이른바 ‘적색’ 노동·농민운동 세력이었고 유라시아대륙에 산재했던 항일무장세력도 볼셰비키혁명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펼쳐졌다.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일제가 ‘적색’을 바이러스처럼 무서워하고 한편으론 자신들의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해먹었듯이 캐나다의 지배세력과 금융업자들도 CCF를 위험시하고 증오했으며, 토미를 빨갱이 목사로 몰았다.

리자이나 선언문이 표방한 사회주의는 그러나 볼셰비키식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추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질서는 통제된 체계에 의해 개인의 독자성이 억눌리는 사회가 아니다.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모든 민중이 더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경제자원을 전체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 우리는 폭력을 통해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캐나다의 오래된 두 정당(자유당과 보수당)은 모두 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여서 사회개조를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표면상으로 나타난 두 정당 간의 차이가 아무리 커도 그들은 그 정당들에게 돈을 대주는 대자본가의 명령에 따라 정부를 운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CCF는 정치에서 이런 자본주의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한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한다. 우리의 운동은 농민단체, 노동단체, 사회주의 단체가 연대한 운동으로, 그 당원들이 운영비를 대고, 헌법에 명시된 방식을 통해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민주적인 운동이다. 우리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를 근원적으로 개조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믿는 모든 사람, 다음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지지를 호소한다.

 

‘다음의 정책’에는 공공의료보험, 실업보험, 연금제도 등이 들어있었고, 국영기업을 확대해서 운송·통신·은행 부문까지 관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자본주의 지배 종식 추구를 명백히 천명하면서도 합헌적, 단계적인 사회주의화를 지향하는 사민주의 노선에 가깝다. 토미는 훗날 “그 선언문이 상당히 현실적인 문건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선언문을 둘러싼 논란이 도대체 왜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대공황을 처절하게 경험한 서스캐처원의 사회주의자들도 그 내용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봤다.

토미를 사회주의자로 만들었지만, 그를 이념 우선의 폭력적인 혁명가가 아니라 단호하지만 실용적인 사회주의자로 만든 것은 성실한 현장실천을 통해 몸에 밴 현실감각이었다. 그는 또 현장실천 없이 머리로만 혁명을 꿈꾸는 급진주의 몽상가들도 경멸했다. “그들은 둘러앉아서 혁명 이후에는 사람들이 집에서 식사를 할지, 아니면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될지를 두고 논쟁했다.” ‘그들’은 토미가 브랜든대 졸업 뒤 사회학 학위를 받은 시카고에서 만난 미국 사회당 지도자들이었다. 토미는 그들과의 첫 회의 때부터 환멸을 느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는 사실”에 넌덜머리가 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쳤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겁니까?” 토미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상황이 나빠져 자연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두고 뒤로 물러서 있으려는 정치적 순수주의자들과 이론가들과도 선을 그었다. “어느 날 단추 한번 누르면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낡은 사회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 사회는 유기적으로 변해간다. 낡은 것을 벗겨내면 새로운 것이 그 자리에 생겨난다. 당신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변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 나는 뒤에 앉아서 사회의 청사진에 대해 말만 하면서 그것을 위해 실제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다.”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베트남 독립투쟁의 영웅 호치민이 당장 피 흘리고 있는 프랑스 식민지, 호치민의 조국 베트남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식민지 민족해방 따위의 거창한 얘기만 하고 있던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에 절망했다는 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혹시 한국 진보세력 내의 자기파괴적인 이념형 파벌분쟁도 닮은꼴이 아닐까.

1934년 서스캐처원 주의회 선거에 CCF 후보로 처음 선거전에 나선 정치 신인 토미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듬해에 치러진 연방의회 선거에선 이겼다. 이후 1979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토미는 44년간의 정치인 경력을 이어간다. 그는 평생 지역과 연방의회 선거에 모두 16차례 도전해 13번을 이겼다. 수도 오타와에서 8년간 연방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1944년 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의 본거지 서스캐처원주 지방선거에 출마한다. 그 선거에서 CCF는 52개 의석 중 47석을 얻어 집권당이 됐고 토미는 주지사가 된다. 주 차원이긴 하지만 북미 자본주의 대륙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사회주의 교두보’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선거에서 그는 캐나다인 65%가 수술비 때문에 빚을 져야 하는 보건의료체제 개혁과 금융자본에 농락당하고 가뭄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삶의 질 개선과 안정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산업을 다변화하고 농민들을 땅에서 내쫓고 있는 동부의 은행가들에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민심이 기울자 당시 집권당이던 자유당은 CCF가 양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들, 모스크바의 앞잡이, 또는 나치당원이라는 따위의 이념공세를 펼쳤다. 은행가 등 자본가들과 그들 편에 선 전국의 신문들은 CCF가 정권을 잡으면 부동산과 보험증권과 은행계좌를 몰수할 것이고, 교회와 술집을 없앨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유력지들은 경험 없는 토미가 주지사가 되면 무능하고 독재적인 주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며, CCF 승리를 예측한 갤럽 여론조사는 보도하지 않고 자유당이 앞서고 있다는 자체 설문조사 결과만 내보냈다. 하는 짓이 어쩌면 그리도 비슷한지.

토미와 CCF는 압승했다. 서스캐처원주의 CCF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농민을 채권자로부터 보호하는 농가보호법을 통과시켰다. CCF가 서스캐처원에서 승리하자 여론을 살피던 연방정부는 가족수당제도를 도입했지만 힘센 금융자본이 반대한 농가보호법은 법정싸움까지 벌이며 시행을 거부했다. 토미가 물려받은 주정부는 사실상 파산상태였고 돈을 빌릴 데도 없었다. 연방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가들, 언론 등 사회주의 정부를 불신하고 두려워하던 적대세력에 맞서 진보적 사업으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는 길은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토미가 항상 말했듯이 굉장히 쉬운 것이다. 그것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한테서 필요한 사람에게로 부를 분배해서,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사람도,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다. 가진 자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내놓지 않으려 하고, 시장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자유 기업 중심의 사회조직은 변화에 저항한다.” 토미는 확고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민주주의자였다.

1947년에는 주 전체에서 무료 입원치료제도를 도입했고, 1950년에는 최저임금제와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으며, 노동조합 가입자 수를 배가했다. 기득권층의 반대와 더불어 진보 정책의 발목을 잡은 또하나의 난제였던 돈 문제를, CCF는 수많은 공공기업 설립과 노동조합 강화로 해결하려 했다. 공공기업 설립은 중장기적으로 재정문제와 고용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조합 설립을 통한 지지층 창출이라는 여러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할 수 있는 주요 정책 목표이자 수단으로 기능했고, CCF가 연속적으로 집권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이를 두고 우석균은 이렇게 정리했다. “CCF의 이런 기조는 복지 프로그램이 단지 교육이나 의료, 사회보장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간산업의 공공기업화와 고용 및 노동문제를 포괄해야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CCF 집권기간에 서스캐처원주는 캐나다에서 가장 경제성장 속도가 빨랐고 자유당으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주 부채도 다 갚았다. 1959년에 전면 무료 의료체제인 메디케어 도입을 선언하자 주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의사들이 거부했다. 1961년 주지사직에서 물러난 토미는 CCF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전국정당인 신민당의 대표가 됐다. 토미가 밑그림을 그린 메디케어가 1962년 7월부터 서스캐처원주에서 시행되자 그 주의 의사 90%가 파업을 벌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대체 의사들을 초빙해오는 등의 정면대결을 벌였고, 의사들은 1개월 만에 무릎을 꿇었다. 토미가 이끄는 신민당은 이후 연방 차원의 메디케어 도입, 연금 및 노동제도 개혁을 선도했다. 이 초지일관이 세상을 바꾸었다. 1972년에는 마침내 캐나다 모든 주들이 메디케어를 도입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가난했던 주 서스캐처원이 무상의료체제 등을 선도함으로써 ‘서구세계에서 사회주의정책이 가장 잘 실현돼 있는’ 복지국가 캐나다의 초석이 된 것이다.

 

무상의료제도는 세계의 상식

해제 등을 통해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인 우석균에 따르면, 그럼에도 캐나다의 의료비 공공보장성 수준은 유럽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2010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통계를 보면 캐나다 의료비의 공공보험 보장 수준은 의료비의 70% 정도다. 18개 비교 대상국들 중에서 45% 남짓 수준인 멕시코와 미국 그리고 55% 수준(그래프상에서 눈대중한 것으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인 한국보다는 높지만, 헝가리나 폴란드보다도 낮다. 체코(85% 정도로 가장 높다)와 덴마크, 영국, 스웨덴, 일본, 프랑스가 80% 이상이고 나머지는 70~80%다. 캐나다의 건강보험 보장성이 상대적으로 이렇게 낮은 것은 외래 의약품에 대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OECD 국가들 대부분이 무상의료제도 또는 그에 가까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게 ‘상식’에 가깝다고 우석균은 얘기한다. 캐나다도 그렇지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비를 내지 않는 나라는 수두룩하다. 일부 치료비를 부담하더라도 많은 나라들이 ‘본인 부담 상한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병원비가 일정 상한액을 넘으면 그 부분은 정부가 대신 내준다.

예컨대, 독일은 의료비가 1년간 소득의 2%를 넘을 경우 나머지는 정부가 대신 내준다. 월급이 250만원이면 연간 60만원이 의료비 상한액이 된다. 아무리 치료비가 많이 나와도 그 이상의 비용은 정부가 내준다는 얘기다. 프랑스는 외래진료의 경우 진료비와 약값을 합해 연간 100유로(약 15만원)가 상한이고 입원진료는 한달 이상 입원하면 정부가 전액 그 비용을 대신 지불해준다. 수술 등의 치료비도 연간 91유로(약 13만원)를 넘지 않는다. 일본도 평균적인 소득자라면 연간 4만4,400엔(약 60만원)이 본인 부담 한도액이다.

영국에서는 외래진료나 입원비가 전액 무료다. 치과진료도 198파운드(약 35만원)가 상한액이고 약값은 102.5파운드(약 20만원)를 넘길 수 없다. 스웨덴은 연간 진료비와 약값을 포함해 약 45만원을 넘길 수 없게 돼있다.

아주 잘사는 나라들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대만도 연간 4만1,000대만달러(약 160만원)가 본인 부담 상한액이고, 타이(태국)도 어떤 병으로 병원을 찾든 하루 병원비를 30바트(약 1,085원)만 내면 되는 ‘30바트 의료보장제도’를 2002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포퓰리스트요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갑부 탁신에 대한 지지가 계속되고, 마침내 그의 여동생이 총리가 되는 타이의 특이한 정치행태 뒤에는 이 ‘30바트 정책’을 추진한 그에 대한 서민의 지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다수의 서방 부국들이 이런 무상의료제도를 시행한 것은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수준에 도달한 때란다. 우리는 공식환율로도 개인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고, 구매력환산지수(PPP)로는 3만2,000달러선을 넘어섰는데도(미국 중앙정보국 자료) 무상의료 도입하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양 여기저기서 겁을 준다. 우석균은 그런 ‘오해’는 대부분 보수 여당과 한통속인 보수언론들이 일부러 만든 것이고, 지난 수십 년간 보수 기득권세력이 무상복지제도에 대해 퍼뜨린 뿌리 깊은 편견 탓이란다. OECD 국가들은 국민소득이 1~2만 달러일 때 평균 공공사회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18~20% 수준이었는데,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진입한 1990년대 중반 복지지출이 GDP의 3%였다. 2만 달러를 넘긴 지금도 8%, OECD 국가들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단다.

결국 복지국가 건설은 재원 확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삶의 의미에 대한 수준 높은 통찰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 비젼 및 의지와 신념에 달린 문제인 셈이다. 지역 소수정당에 이념공세 등의 여러 불리한 조건을 뚫고 초지일관으로 캐나다를 바꾼 토미 더글러스의 일생은 그걸 입증하는 훌륭한 사례다.


한승동 ― 〈한겨레〉 논설위원. 저서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그리고 다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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