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2호 2012년 1-2월호  인쇄용  

 

  소농과 연대하여 자유무역협정에 불복종을

  송기호

 

용어에 드러나는 본질

한미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을 말할 때면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명칭부터가 거북하다. 대개 이름은 그를 통해 담아내려는 사물의 본질과 가까울수록 유익하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쉽게 전달될수록 좋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 또는 ‘FTA’라는 용어는 상식에 어긋난다.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의 특징은 ‘자유’가 아닌 배타적 특혜이다. 그리고 그것이 규정하는 주된 대상은 ‘무역’이라기보다는 건강의료보험이나 영리병원과 같은 공공정책이다. 게다가, 시민들의 입에 잘 달라붙지 않는다.

그것을 달리 부를 우리식 이름이 이다지도 없을까? 2000년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때,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를 ‘입세(入世)’라고 명명해서 그 내용을 대중에게 설명했다. 오늘날 중국의 심각한 내부 불평등문제를 보면, ‘입세’가 중국에게 끼친 영향은 객관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자들이 대중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제공한 점은 평가할만하다.

내가 용어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그것이 한미자유무역협정(아, 무언가 다르게 부를 이름이 이다지도 없을까!)이란 것의 중요한 본질을 숨기지 않고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른바 ‘아이에스디’라는 용어는 어떠한가? 소농의 귀에 ‘아이스 드링크’ 비슷하게 또는 무슨 농약 이름과 비슷하게 들릴 이것을, 관료들은 거리낌 없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한다. 자신들이 신지식의 전파자인 양 자랑스럽게 이 명칭을 쓴다.

그러나 시민과 소농 가운데 누가 이른바 ‘아이에스디’란 단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일 이른바 ‘아이에스디’라는 것이 한국 사람의 필요를 담아내고 한국의 사회가치가 낳은 것이라면, 이 용어는 진작 이곳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알아들을 쉬운 다른 낱말로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비록 외부에서 유래한 것이라도 한국의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사용할 것이었다면 시민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낱말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권리’나 ‘자유’라는 낱말도 약 100년 전에 독일어나 영어 알파벳의 모습으로 처음 유입되었지만, 시민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그것은 우리 안의 가치와 사고체계와 소통의 산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바깥에서 이식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이 적용되고 집행되는 데에 외부 주도성이 관철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한미자유무역협정의 본질이다.

 

대중 소외시키기 전략

이 글은 아직 무엇이 ‘아이에스디’인지 그 의미를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ISD’라는 알파벳도 병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2007년부터 이 용어를 나의 사고체계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에 《한미 FTA의 마지노선》이란 책을 내면서 일부러 이 낱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투자자 국가 제소’라는 투박한 번역어를 만들어 썼다. ‘투자자 국가 중재 회부’라고 부르기엔 너무 길어서 그렇게 번역했다. 나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물론 사석에서도 이 낱말을 일절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도 이 용어를 쓰지 말자고 애써 이야기한다.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한분과 함께 생방송에 나갔는데, 그분이 자꾸 이 용어를 쓰지 않는가? 그래서 소심한 성격을 무릅쓰고 생방송 중에 그만 이렇게 말해버렸다. “아이에스디란 말 하지 마세요!”

마치 어떤 농약을 ‘디디티’라고 쉽게 부르듯이, 이 제도를 그렇게 달랑 ‘아이에스디’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나의 번역어에서 알 수 있듯이, 투자자(보다 사실적으로는 기업)가 한국의 공공정책을 국제 중재에 회부하는 제도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그렇게 회부당하는 데에 법적으로 필요한 동의문서이다.

그런데 세사람의 국제 중재인은 한미자유무역협정문과 국제법에 따라 판단을 한다. 한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하지 않는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사회의 대표자들이 만든 법률이건만 이 땅에서 시행되는 공공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더 새로운 사실은 한국 국회의 법률 자체가 국제 중재에 끌려가 판단을 받는 대상이 된다. 해가 달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달이 해를 비추는 것이다. 국회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여 대기업의 활동 반경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대기업이 국회의 법률을 국제 중재에 데리고 가 법률을 조정한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시민과 소농이 대표자를 뽑아 규범을 만들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공공정책에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부여하지 못한다. 반쪽짜리 법으로 전락한다. 반쪽 민주주의이다.

그렇지만 관료들은 이른바 아이에스디라는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하여 마치 새로운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양, 국제 표준인 양 영어로 포장한다. 관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이 영어 단어는 들어나 봤니? 이 정도는 알면서 살고 있니?” 이른바 아이에스디란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적지 않은 대중들에게 민주주의의 위기문제가 영어 용어 실력 또는 세계 추세를 따라가는 문제로 바뀐다. 관료들이 이른바 아이에스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치밀한 홍보전이다. 그들은 대중의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을 충분히 활용한다. 한국의 대중은 영어로 된 용어나 단어를 앞에 두고선, “뭐 이딴 것이 있어?”라고 묻지 못한다. 그를 수용하려고 애쓴다.

 

소농

한미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 기습 날치기된 후 내겐 몇가지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농민’이란 말을 가급적 쓰지 않고 그 대신 ‘소농’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의 또하나의 본질이 동아시아 자작농의 지속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앞으론 한국의 농업을 바라볼 땐 언제나 미국의 대규모 농업을 바로 옆에 놓고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업만을 따로 떼어놓고 이리저리 보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2차 세계대전 후 동아시아의 소작인들의 반봉건 투쟁은 농지개혁과 자작농 창설을 이룩했다.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대만 등에서 봉건적 대지주가 독점한 땅을 쪼개어 소작농에게 분배했다. 봉건 지주로부터 당하던 착취에서 해방된 자작농들의 근면과 평등이 지금의 동아시아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동아시아의 농지개혁 시기부터 미국의 대규모 농업이 전면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입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의 붕괴한 밀 농업과 면화 농업에서 답을 알 수 있다. 미국의 220만개 농장의 평균 규모는 약 51만평(약 170만제곱미터, 약 170헥타르)이다(2007년 미국 농업센서스). 미국의 대규모 농장이 값싼 농지에서 대량 생산한 농산물이 전면적으로 진입하였다면, 동아시아의 자작농들의 벅찬 환희는 곧바로 좌절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의 동아시아 사회는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은 1995년에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무역기구 질서에 편입될 때에도, 미국의 대규모 농업의 거친 습격을 막는 조정 장치를 두었다. 높은 관세율과 긴급수입제한조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미자유무역협정은 바로 이러한 최소한의 조정 장치를 제거하기 위하여 미국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균 관세율이 55퍼센트에 이르는 한국 농업 보호장치를 허무는 것이다. 이 관세율 수준은 한국이 세계무역기구에 농업을 포함시키는 대가로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로부터 보장받은 관세율이다. 김영삼 정부가 1994년에 농민에게 한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더라도 그 충격을 막을 장치를 마련했다고 선전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없어진다.

한국의 관료들은 당장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관세율을 인하하는 것을 성과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시계바늘은 멈추는 법이 없다.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는 또 어떠한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세계무역기구가 농업분야에서 허용하는 ‘특별 긴급수입제한조치(SSG)’를 포기한다(3.3조 및 부속서 3―가). 이것은 특별히 농산물의 수입자유화 과정에서 국내 농업에 피해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장치이다. 이를 이용하면 다른 공산품에 비해서 농산물의 경우 더 쉽게 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이것을 제거한다.

동아시아의 자작농을 완전히 발가벗겨 미국의 대규모 농업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중요한 본질이다. 그래서 난 앞으로 한국의 농업을 바라볼 땐 언제나 미국의 대규모 농업을 바로 옆에 두고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농업을 생각할 때 ‘농민’이란 용어보다는 ‘소농’이라는 낱말을 통하여 사고하는 것이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있게 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되면 한국에서 기존에 대농이던 집단도 미국의 대규모 농업 앞에서는 소농이다. 이미 2010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순전히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팔아 번 소득만으로 농가 가계비를 모두 해결하려면 10헥타르 이상의 농사를 지어야 한다. 7헥타르에서 10헥타르 사이의 농가들도 농업소득만으로는 가계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통계청, 2010 농어가 경제조사 결과). 이런 상황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본격화하면 한국에서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판 소득만으로 가계를 꾸리는 집단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소농이며, 자작농 개념은 더이상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불복종만이 대책이다

용어문제는 그만 보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가자. 나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불복종을 제안한다. 불복종이 유일한 대책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한국 소농의 잠재력과 장점 자체를 공격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전자조작식품 체계로 한국을 포섭한다. 미국은 2007년 4월, 한미자유무역협정 타결 직전에 ‘농업생명공학 양해서(Understanding on Agricultural Biotechnology)’를 디밀어 관철시켰다. 새로운 유전자변형 작물이 출현하더라도, 이 작물이 기존에 승인된 유전자변형 작물의 ‘전통적인 교잡’에 의해 생산된 ‘후대교배종’일 경우, 그 새 변형체로 인해 인간과 동식물의 생명과 건강에 새로운 과학적 위해성이 창출된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으면, 한국이 이 작물에 대한 별도의 위해성 평가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제2항). 그리고 유전자조작식품 표시제에 대한 한국의 법률과 규제도 미국이 ‘예측할 수 있는(predictable)’ 것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제3항).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되면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유전자조작식품 표시제 강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불복종이 아닌 대책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농업개방 대책은 20년 동안 실패했다. 1994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농어업의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한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농업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총 42조를 썼다는 〈농업농촌발전계획〉, 노무현 정부의 총 119조원을 쓰겠다는 〈농업농촌대책〉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2010년, 농가의 68퍼센트가 년 농산물 판매액이 1,000만원이 되지 못하는 빈농이다(2010년 농어업센서스). 그리고 농사만 지어 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가는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불복종만이 대책이다.

 

민주주의의 식품체계를

한미자유무역협정 불복종은 소농이 생존할 식품체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20년 동안 실패한 소농 탈락정책을 지역에서 먼저 중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농업의 대안은 소농이 접근할 수 있고, 주도할 수 있는 식품체계를 만드는 데에 있다. 식품체계란 소농이 소농으로 고립·단절되지 않고 시민과 지역사회와 연계되는 틀이다. 지금 농촌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학교급식에 지역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조례를 제정해야 한다. 현재 ‘우수한’ 농산물을 우선 사용토록 한 조례를 ‘지역 농산물’ 우선 사용으로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그 힘은 지역의 민주주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전국적 차원에서 우리 농산물 급식조례 제정운동을 벌이는 것이 시급하다. 단지 초·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과 복지시설의 급식에서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는 시스템이 자리잡아야 한다.

서울과 대도시 학교급식도 연계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할 수 있다. 서울 구로구 급식조례(‘친환경 무상급식 등 지원에 관한 조례’)는 좋은 모범사례이다. 이 조례는 유전자조작식품의 급식 사용을 금지하는 등 ‘서울특별시 친환경 무상급식 등 지원에 관한 조례’ 등 서울과 전국의 여러 무상급식 조례와 유사하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학교급식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할 식재료를 “농업인들과의 사전 계약 방식으로 재배한 친환경농산물수급체계에 따라 생산된 농·수·축산물과 이를 원료로 생산한 가공품”으로 정하고 있다(제2조 제7호 가호).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조례는 소농과의 연계와 소통을 급식체계의 필수적 요소로 규정한다. 이것이 우리 농업의 대안인 소농 주도 식품체계의 한 보기이다. 구로구만이 아니라 서울의 다른 구의 급식조례를 이렇게 개선해야 한다. 소농이 접근하고 주도하고 생존할 식품체계를, 민주주의의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농과 연계된 식품체계의 싹을 키워야 한다.

 

소농의 완전한 단결권 확보가 관건

그리고 지역 민주주의의 힘으로, 지역정부의 모든 정책의 우선권을 지역의 소농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는 데에 두어야 한다. 급식과 같은 공공영역을 넘어서, 시장영역에서도 소농의 장점을 최대로 발휘하고 주도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한다. 지역의 대형 마트가 지역 식품체계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소농이 주도하도록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 제한 조례를 제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농이 주도하는 ‘지역 농산물 시장’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민주주의가 지역 식품체계와 적극 결합하는 모범사례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소농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민주주의의 힘으로 소농들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단결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사상누각이 되지 않으려면 소농 협동체와 지역 식품체계의 유기적 연계를 늘 굳게 해야 한다. 가령 앞에서 본 구로구 급식조례와 같이 지역 식품체계와 소농 조직이 처음부터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식품체계로부터 고립되어버리면 소농 협동체는 살아남기 어렵다.

나아가 지역 민주주의는 소농 협동체가 지역 식품체계와 결합하는 여러 다양한 협동 활동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모든 농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존 농협의 기득권과 힘 앞에서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닐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는 눈에 보이는 대형 창고나 유통시설을 짓는 데에 공공 예산을 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농 협동체와 식품체계의 연계를 창조하고 강화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작게는 지역의 소농 협동체들이 물이나 농지와 같은 지역 농업자원을 함께 관리하게 하고, 이를 특성화하여 식품체계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더디더라도, 지역마다 있는 지역축제를 그 지역의 농산물이 안정적으로 소비되는 식품체계로 성장시키는 장기적 계획도 중요하다. 소농이 생존할 자리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결국 지역 식품체계를 구상하고 주도하는 지역 소농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지역 민주주의의 힘을 모아 중앙정부에 대하여 소농 농업협동체의 활동을 독점행위로 단속하지 않도록 하는 법적 개선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휴대전화를 세 회사가 독점하는 체제는 유지되면서, 소농들의 협동에 대해선 독점으로 규제하는 악법을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협동체 설립의 자유를 가로막는 농협법도 바꾸어야 한다.

소농들에게 완전한 단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소농이 내부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에 적응하고 시장을 끌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뉴질랜드는 농업에 정부 보조금을 주지 않는 나라라고만 말하지 말고, 뉴질랜드의 농민들이 어떻게 단결권을 보장받고, 시장을 주도해나가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먹는 키위라는 과일을 생산하는 뉴질랜드 농가들이 키위 시장을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제도적 틀에서 길러진다. ‘키위 수출규정’, ‘키위 산업구조 개편법’과 같이, 농민이 협동체의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제도적 자산이 보조금보다 소농에게 더 긴요하다. 일시적 보조금은 소농을 구걸하는 신세로,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 소농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지역 민주주의의 힘을 모아 소농의 완전한 단결권을 요구해야 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란 것과 맞부딪혀 소농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식품체계를 주도하는 과제를 쉽게 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없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자작농이 만든 동아시아의 평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난 믿고 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굴곡이야 있겠지만, 바로 그렇게 절실한 과제이기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길에는 소농인가 도시민인가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 소농이든 시민이든 똑같이 중요하다. 결국 한미자유무역협정 앞에서 둘은 하나이다. 소농이 시민이 될 수도 있고, 시민이 소농이 될 수도 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은 그 둘을 지금보다도 더 멀리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송기호 ― 변호사. 조선대 법대 겸임교수. 저서로 《WTO시대의 농업통상법》, 《한미FTA 핸드북》, 《맛있는 식품법 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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