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2호 2012년 1-2월호  인쇄용  

 

  '자유무역'을 넘어 '기본소득'으로

  김종철

 

한미FTA는 아무리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이 협정은 양국 사이에 무역과 투자에 관련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말끔히 제거하면, 두 나라의 경제가 동반 성장을 통해서 새롭게 도약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여 협상이 시작되어,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조만간 이 조약이 발효된다면,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것은 헌법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우리들의 삶을 온갖 영역에서 지배·통제하게 될 것이다.

숱한 문제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협정의 명백한 불평등성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미FTA 이행법’이라는 새 법률에 의거하여 협정 내용을 연방 및 주정부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음에 반해서 한국은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모든 조항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만 해도 그렇다. 이 말썽 많은 조항은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해당 국가의 공익정책을 무력화시켜도 상관없다는 심히 위험한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은 사실상 한국 내에서만 효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미국은 ‘이행법’에 따라 자신의 기존 법률에 어긋나는 내용은 수용하지 않을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국가에서 헌법을 개정하려면 권력자의 의중이나 국회의 가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주권자인 국민 대다수의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이를 통한 합의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헌법 이상의 지위를 갖게 될 통상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도 그 절차는 당연히 헌법 개정 절차에 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미FTA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의 동의는커녕, 비판적인 목소리들을 철저히 억압·무시함으로써 진행되었고, 마침내 국회에서 날치기로 가결되었다. 이 명백한 절차상의 결함은 이것이 정당성을 완전히 결여한 조약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한미FTA가 국민경제의 새로운 출구가 될 것이라는 가정도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자유무역협정에 의한 실제 상황의 변화를 보면, 이 협정은 극소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수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또하나의 수탈 메커니즘이라는 게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 후 17년이 된 멕시코는 지독한 양극화 사회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을 비롯한 기층민의 자립·자족적 삶의 기초가 돌이킬 수 없이 괴멸되고 말았다.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캐나다는 NAFTA 이전에 볼 수 있던 여유롭고 안정된 사회가 아니다. 경제활동은 정체되고, 실업률은 높아지고, 공공서비스체계는 후퇴하고 있다.

이러한 선례가 있고, 다수 국민이 치열하게 반대해왔음에도 기득권 세력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여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적인 이익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늘 ‘국익’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기득권 세력이 국민경제 전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을 근거는 희박하다. ‘국익’을 위한다는 그들이 FTA를 통해 추구하려는 게 기실은 헌법적 가치를 폄하하고, 관세주권과 식량주권, 사법주권을 방기하며, 국가의 공공서비스체계를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한미FTA는 ‘국익’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그 진실한 정체를 포착할 수 없다. 국가 간 조약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원리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이 협정을 통해 실현될 이익은 결코 국민 다수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이익이 있다면 대자본과 투자자, 기생적 정치가, 관료, 언론, 학자들에게 국한된 이익―그것도 단기적인 이익―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자유무역협정으로써 기득권층의 이익을 연장·확대하려는 기도도 현실적으로는 성공할 확률이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 급속히 무너지고 있는 글로벌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FTA는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인 프로젝트이다. 실제로, 지금 세계경제는 ‘참여정부’가 한미FTA 협상을 시작했을 때와 매우 다른 것이 되었다. ‘참여정부’는 예컨대 미국의 ‘선진’ 금융시스템을 도입하면 한국의 금융산업이 질적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선진’ 금융시스템이란 실상 사회적 약자들을 제물로 삼는 부도덕한 사기술(詐欺術)임이 2008년 월가(街) 금융파산 사태로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비록 선의에서 출발했다고 하지만, 세계경제의 흐름을 한치 앞도 읽지 못하고 협상을 밀어붙인 것은 ‘참여정부’의 중대한 실책이었다. 하지만 그 실책은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미국과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이 분명히 드러난 판국에 기어이 한미FTA를 강행 처리한 이명박 정부의 경우는 단순한 실책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파국적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무역의 부진이나 해외투자가 저조한 데에 근본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현재의 위기는 30년 이상 1퍼센트의 이익을 위해서 99퍼센트를 희생시키는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여온 반사회적, 비윤리적, 반민중적 통치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산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해온 반면에, 대량 실업, 대중적 빈곤, 사회적 양극화를 조장해온 신자유주의 노선은 필연적으로 구매력 결핍 현상을 낳았다. 그 결과가 소비부족과 과잉생산에 의한 만성적 불황이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경제민주화가 선행되고, 좀더 공정하고 인간적인 사회로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이것을 외면하고, 전대미문의 대규모 금융투기와 금융조작에 의한 거품경제의 확대를 통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데에 열중해왔다. 하지만 속임수에 기초한 거품경제가 지속될 리 없다. 2008년, 월가(街)를 휩쓴 금융파산 사태는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거대 금융회사들의 파산을 초래한 근원을 들여다보지 않고 임기응변식 처방에 급급했다. 그리하여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 또다시 국민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과 동시에 달러를 마구 찍어냄으로써 일시적인 경기상승을 유도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의 결과가 미국 자신과 유럽을 포함한 세계 전체에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심각한 경제위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무역협정이란 글로벌자본이 어떻게든 종래의 비윤리적인 경제·사회구조를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위기상황을 탈출해보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회복 시도는 실현성이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일시적 성공을 거둔다 해도 종국에는 실패할 게 분명하다. 세계는 지금 금융위기 이외에 자원-에너지-환경위기라는 복합적 위기상황, 그중에서도 특히 원유공급 감퇴라는 불가역적인 사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수십년 전부터 제기돼왔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내놓은 최근 보고서는 특기할만하다. IEA는 사실상 석유생산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그동안 석유 증산이 더 계속될 수 없는 시점, 즉 ‘피크오일’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외면해왔다. 그런 기관이 2010년 10월의 보고서에서 피크오일이 이미 2006년에 지나갔음을 인정한 것이다.

피크오일이 지나갔다는 것은 지난 반세기 이상 세계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결정적인 요인이 곧 소멸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산업경제는 값싼 석유가 풍부히 공급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는 체제이다. 석유는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제품의 원료이다. 자동차, 선박, 항공기, 가전제품, 의약품, 플라스틱, 화학섬유, 현대식 농축산, 수산업도 석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면서 가장 중요한 농업을 내팽개치고 공산품수출-농산물수입이라는 패턴을 고집하며 한국경제가 성장을 계속해온 것은 무엇보다 값싼 석유 때문이었다.

석유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값싼 석유시대의 종식은 거의 전적으로 값싼 석유에 의존해온 지금까지의 산업경제 및 산업사회 전체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놓을 게 틀림없다(물론 타르샌드나 셰일오일 등 비재래식 석유의 개발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게 과연 환경적·기술적·경제적 측면에서 타당성이 있고, 또 시간적으로 너무 늦지 않게 개발될 수 있을지는 심히 불확실하다).

피크오일이 지나갔다면 그 여파는 조만간 가시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 전체 무역 화물의 90퍼센트를 감당하고 있는 선박운송이 유가 상승으로 대폭 축소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리하여 원유 1배럴이 200달러가 되면, 동아시아와 미국 간 교역은 사실상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물론 경기후퇴 국면에서의 수요 감소로 일시적인 유가 하락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장기적인 상승 추세가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석유시대의 종식으로 산업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상투적인 관념, 고정관념들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먼저 포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완전고용과 복지국가라는 개념일 것이다. 완전고용이나 복지국가는 선진사회를 구상·설계하는 데에 빠트릴 수 없는 요소로 간주돼왔지만, 이제는 그게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완전고용이나 복지국가는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더이상 허용될 수 없는 탈석유시대에 그러한 개념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용문제이다. 이제부터는 어디서나 산업사회의 고용능력은 갈수록 감퇴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일’ 없이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 인간에게 일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오랫동안 고용이라면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 속의 산업노동을 중심으로 사고해왔다. 그러나 산업노동은 장구한 인류 생활사에서 찰나에 불과한 노동형태일 뿐이다. 더욱이 산업노동이란 인간의 내면적 욕구와 자연스러운 생리적·심리적 리듬을 억압함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는 거의 강제노동에 가까운 노동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 산업노동은 거의 예외 없이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파멸적인 시스템에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인데도, 흔히 간과되고 있다.

하기는 무엇보다 석유문제 때문에 대규모 산업시스템과 거기에 결부된 산업노동은 더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점점 축소되는 산업고용 기회를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라는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도 결국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관건은 고용 개념을 종래의 대규모 산업시스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원과 에너지, 특히 석유 낭비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산업시스템을 과감히 축소하고, 자연에너지와 지역 중심의 순환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멸 직전에 있는 농사를 살리는 일이다. 농사란 단순히 산업의 하나가 아니다. 농사는 인간의 지속적인 생존·생활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이다. 그런데도 석유의존적 삶이 영구히 계속될 것처럼, 우리들 대부분은 농사가 갖는 근본가치를 몰각해왔다.

우리는 경제성장이라는 허망한 개념에 더 붙들려 있을 이유가 없다. 경제성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지속 가능한 농사 중심의 순환적 삶으로 시선을 돌릴 때, 고용문제를 비롯한 온갖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소될지도 모른다. 가령 농사가 활력을 띠고, 농촌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들이 살아난다면, 새로운 삶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창조적인 시도와 실험이 가능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전력생산 방식에서도 화석연료나 핵에너지에 의존하는 중앙집중식 거대 발전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집집마다 마을마다 자립적인 자연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들이 세워질지 모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전력을 생산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되고, 자연히 전력을 비롯한 물자를 아끼는 습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검소한 생활만이 주는 진정한 자유의 삶에 도달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역 중심 순환경제체제가 영속적인 일자리를 풍부히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현재 독일에서 재생가능에너지 분야의 고용인구가 화력-핵발전소 노동인구의 열배가 넘는다는 사실도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 순환경제에서 요구되는 ‘일’이란 산업노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 즉 개인이 자신의 타고난 소질을 발휘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이기 쉽다. 따라서 그러한 일은 단순한 생계 방편을 넘어서 그 자체가 유희나 예술적인 요소를 내포한 활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면, 탈석유시대의 시작은 인간다운 삶의 재생을 위한 훌륭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산업혁명 이래 인간은 ‘거대기계’ 시스템 속에서 철저히 관리된 삶을 강요당해왔고, 대다수 인간에게 허락된 노동은 한갓 기계의 부속품 역할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산업노동에 종사하는 인간은 어디서나 협소한 지평에 갇혀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시야와 인간다운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끊임없이 박탈당해왔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해방이란 상상력의 회복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시대의 불행은 삶의 근원적인 차원에 주목하는 시각이 늘 ‘현실주의’ 논리에 의해 무시되거나 혹은 조소(嘲笑)의 대상이 된다는 데에 있다. 이 상황에서 상상력이 허용될 수 있는 공간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 흔히 말해지는 현실주의란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침몰 중인 선박의 갑판에서 고작 의자 몇개의 위치를 바꿔놓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현실주의인 것이다. 지금처럼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폐색상황을 벗어나자면, 현실주의 논리가 아니라 그 논리에 비타협적으로 맞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실현이 어렵다고 몽상마저 포기한다면, 미래에의 출구는 끝내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노동과 삶에 관련하여 새로운 이상을 꿈꿀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의 목표였던 ‘완전고용’ 대신에 ‘완전향유’ 사회를 지향함으로써 사람마다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사회를 그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러한 사회를 위한 실현 방안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아마도 ‘기본소득제’의 도입일 것이다. 기본소득이란 개인의 소득수준이나 취업의사를 묻지 않고 일률적으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정기적으로 최소한의 생존·생활에 필요한 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국가 주도 복지시스템과는 달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교환을 장려·보장함으로써 민주적 시장을 강화하고, 내수경제를 활성화하면서 지속 가능한 경제시스템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제도이다. 기본소득제는 단순한 생활지원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공황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종국에는 자연환경을 완전히 파괴할 게 분명한 자본주의체제를 비폭력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최상의 합리적 방안일 수도 있다.

기본소득제는 당장 전면적 시행이 어렵다고 해도, 긴급한 현실문제의 해결에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무 실효성이 없는 종래의 농업대책은 중지하고, 이제부터라도 농민들에게 일제히 매월 100만원 정도 정액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국가안보를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는 게 당연하다면, 나라의 근본 존립기반인 농사와 자연환경과 토착문화를 지키는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건강한 사회, 장래성이 있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민을 존경하는 사회이다. 오늘날 쿠바에서 농민(小農)의 소득은 대학교수보다 3배나 많다. 한 사회의 장래는 농민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달려있다. 지금 절망 속에 있는 한국의 농사현실을 생각하면,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제보다 이 나라에 더 긴급한 일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 보장은 현재의 국가예산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이다. 그러나 국가 구성원 전체에 대한 전면적 기본소득제에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현대 금융통화제도의 본질과 운용방식을 들여다보면, 합리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위기는 기득권층의 탐욕과 어리석음, 정책적 오류에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금융통화제도의 모순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 모순은 현재의 통용화폐가 거의 전적으로 은행에 의한 대출금, 즉 빚이라는 사실에 결부돼 있다. 은행대출금은 일정 기간 내에 상환해야 하고, 반드시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야 한다. 그리하여 원금+이자로써 갚고, 이 상환된 돈을 근거로 다시 대출금이 발생하고, 그 대출금에 대하여 또 누군가 원금+이자로써 빚을 갚고, 다시 대출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확대순환 과정이 반복되려면 세계경제가 전체적으로 성장·확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순조롭지 않으면, 확대순환에 의해서만 존속이 가능한 금융제도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고, 그 금융제도에 기초한 경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의 경제위기는 근본적으로 세계적 경제성장이 둔화·축소됨에 따른 금융제도의 전면적인 기능부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능부전의 일차적인 책임은 금융자본의 탐욕과 속임수, 정부의 직무유기와 정책오류에 있다고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가 직면한 복합적인 자원-에너지-환경위기, 특히 석유문제가 종래와 같은 경제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음이 확실하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현대의 금융통화제도이다. 이 원리를 직시하지 않고, 임시방편적인 성장을 도모하려 해봤자 시스템자체의 궁극적인 붕괴는 불가피하다. 이 붕괴 과정의 초기 단계가 지금 세계 전역에 쓰나미처럼 닥치고 있는 금융위기인지 모른다.

결국 합리적 극복방안은 경제성장을 강제하는 구조적 모순의 혁파에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통용화폐 대부분이 은행대출금이라고 하는 것은 통화발행권이 국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은행업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뜻한다. 민간업자들이 공공재인 통화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사익을 취하는 구조가 실은 모든 위기와 악폐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금융통화제도의 발본적 개혁이다. 그리하여 민간업자들이 부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통화발행권을 국가 혹은 공공기관이 회수, 이자 없는 공익성 화폐를 발행하여, 원활한 교환질서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인 것이다. 요컨대 핵심은 은행의 공공화이다. 그렇게 되면 이자 없는 공공화폐와 은행 수익금을 기본소득을 비롯한 공익 용도로 쓸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공공은행이란 낯선 게 아니라 미국의 노스다코타 주립은행과 같은 성공적인 선례가 있다. 문제는 기득권자들의 저항에 맞서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정치적 의지와 능력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치시스템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2011년 12월호에 실린 글 〈완전고용사회에서 완전향유사회로〉를 대폭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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