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21호 2011년 11-12월호  인쇄용  

 

  창간 스무돌을 맞으며|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김종철

 

수목(樹木)은 중력의 힘에 의해 아래쪽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중력에 역행한다. 생명이란 비협력주의가 아닐까?   ― 균터 안더스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되돌아보면 힘겨운 시간의 연속이었으나 어느새 20년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창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의 규모나 살림살이는 별로 변한 게 없고, 생존을 위한 기반은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사회 속에서 중요한 매체가 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왔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잡지를 성심껏 지원해주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녹색평론》이 실제로 얼마나 쓸모있는 일을 해왔느냐일 것이다.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이 점에 관련해서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오늘날 언론이 처해 있는 위기상황이다. 언론은 지금 복합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지만, 최대의 위협은 상업주의적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기업 혹은 경영조직체로서 언론은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으려면 비즈니스의 논리를 외면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미디어가 광고주라는 이름의 금권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인습적인 사고, 편견, 이념적 편향에 의거하여 언론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 ‘미디어 소비자’의 욕구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언론 ― 매스미디어 ― 이 엄밀한 의미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원래 언론·출판행위란 ‘반역’을 위해 시작된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반역’이란 물론 주류의 가치, 즉 지배적인 제도와 관습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뿌리에서부터 의심한다는 뜻이다. 서양에서 출판을 가리키는 말(edition)과 반역행위를 가리키는 말(sedition)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기성의 체제와 지배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언론은 예로부터 어용언론이라고 일컬어져왔다. 오늘날 언론이 광고주와 ‘미디어 소비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어용언론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은 자신의 본래적 사명 ― ‘반역행위’ ― 을 스스로 배반하는 행위를 강요당할 위기상황에 항상적으로 처해져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명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매체밖에 없는지 모른다. 소규모일수록 외부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녹색평론》이 감히 그러한 독립매체에 속한다고 주장할 염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노력은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참사 이후 확연해진 원자력의 치명적인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온갖 허위, 속임수, 협잡에 대해서 대다수 미디어가 침묵하거나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에서 《녹색평론》이 비판적인 물음을 계속 던질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작은’ 매체 특유의 독립성 덕분일 것이다.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 ―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예를 들어, 현재 이 나라의 ‘진보진영’이 거의 일치해서 제시하고 있는 ‘복지국가’ 논리에 대해서도 《녹색평론》은 계속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물론 복지국가론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복지국가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성장과 생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상, 그것이 빈곤과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는 방책으로서 정말 실효성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복지국가 논리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극히 의문스럽다. 복지국가란 국가의 계속적인 세수(稅收) 증가를 전제로 해서만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세수 증가는 경제성장과 고용의 안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석유공급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세계금융시스템이 뿌리에서부터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적 고용이 확대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설령 그러한 기적이 비록 단기간은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결과는 생태적 자멸행위가 될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그렇다. 많은 논자들은 이것을 한국사회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우려는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현상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고, 세대 간 인구비율 균형이 붕괴되어 최소한도의 복지국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게 문제이다. 그 결함이란 그들이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은, 오늘날 온갖 징후로 보아서, 앞으로의 세상은 결코 현재상황의 단순한 연장이나 확대된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의 전적으로 값싼 석유에 의존해 있는 현재의 산업, 금융, 교역, 에너지, 식량 시스템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물질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정치, 문화, 교육 등 중앙집권적 시스템 전부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는 더 유지될 수 없는 날이 조만간 닥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우려는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경제논리에 의거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그것은 또한 심히 비윤리적인 인간관·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어떤 시스템에 필요한 도구가 되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다. 물론 개인이 행복한 삶을 누리자면 복지시스템을 협동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독특한 인격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야만적인 폭력이 되고, 개인은 시스템에 복속된 부품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온 세계가 갈수록 인구과잉 문제로 고뇌가 깊어지는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활력을 위해 인구증가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명백히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세계 전역에 걸쳐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어디서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환영해야 할 일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인구감소 자체가 아니라, 왜 지금 한국사회에서 출산 저하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 사회에서 아기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초인적인 용기와 고난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 어쩌다가 이 사회가 미래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 절망적인 사회로 떨어져버렸는가 ― 저출산 현상에 관련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진보적’ 사상과 ‘개혁적’ 담론은 거의 예외 없이 근시안적 현실진단과 피상적인 처방에 머물러 있다. 이 불모적인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대 원인은 그러한 사상·담론 속에 에콜로지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의 지식사회에는 아직도 에콜로지에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이들이 허다하다. 많은 지식인들은 아마도 에콜로지문제는 기술적으로 극복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은 당장 급한 것은 먹고사는 경제문제이지, 에콜로지는 이차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편협한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전쟁과 학살로 치닫고 있던 자기 시대의 상황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톱으로 베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위로 묘사한 바 있다. 이것은 브레히트 시대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상황을 더 적실하게 드러내는 예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경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다. 그동안 ‘경제’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지난 200~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한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경제’ 개념을 척결하지 않는 한, 갈수록 심화되는 환경―자원―에너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고사하고, 최소한도의 기초적 생존·생활도 불가능해지는 날이 곧 다가올 게 분명하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에 의존하여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착각이자 망념이다.

시급한 것은 경제성장, 생산력 증대,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통한 ‘발전’ 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낡은 공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자연의 본성과 리듬에 순응하는 순환적인 패턴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요컨대 산업자본주의 이전,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었던 순환경제 시스템의 복구·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순환경제란 단순히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는 생활패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절제하고, 절약하는 것은 오랫동안 인류사회에서 기려온 덕행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느 때나 존중돼야 할 생활자세이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개개인이 물자를 절약하는 미덕을 발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절약하더라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고, 오염된 환경은 결국 거주 불가능한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지하(地下)자원 ― 원자력을 포함한 ― 에 의존하지 않고, 영구적 지속이 가능한 태양에너지 중심의 지상(地上)자원에 의존하는 생활패턴의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순환적 생활패턴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자와 에너지 조달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용문제만 해도 그렇다. 좁은 의미의 경제문제로서만 볼 때, 부당해고, 실업, 비정규직 등 ‘일자리’ 문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로 환원되기 쉽다. 그리고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상, 고용문제의 해결은 난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격심한 경쟁을 강요하는 글로벌경제시스템 속에서 기업은 단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이윤 증대를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업은 윤리적 덕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말이다. 기업에 의한 기부, 지원, 자선사업이란 것도 결국은 더 많은 이윤 확보를 겨냥한 간접적인 투자행위일 뿐이다. 오늘날 기업 쪽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자의 존재이지 더 많은 노동자의 존재는 분명 아니다. 이미 시장은 과잉 생산물로 넘쳐나고, 자동화·기계화의 급속한 발달로 생산현장에서의 인간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는 아직도 초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고, 기업의 방종한 행태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곳이 허다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애국심 따위에 호소하는 것으로써 기업의 해외이전을 막아낼 도리는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은 계속 확대·심화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용문제의 전망은 실로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전태일의 시대에 노동자는 ‘착취’를 당했으나, 지금 김진숙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배제’이다. 한때 이 나라 서민층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 판사,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규직’이 아이들(그리고 부모들)의 꿈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 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 중심, 자립적 생산·생활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은 흥미로운 참조사례를 제공한다. 후쿠시마 사태 후 원자력을 2020년까지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한 독일의 경우를 보면, 진정한 선진사회란 결국 합리적 상식이 살아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르노빌에 이어 또다시 묵시록적인 핵 참사를 목도하면서 독일사회는 더는 원자력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정상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간사회라면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당연함이 쉽게 통하지 않는 게 또한 오늘의 세계 현실이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기회를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로 삼겠다는 한국정부나 아직도 원전문제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일본정부를 보면, 오늘날 이 세상이 악마적인 정신에 의해 깊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독일의 자세는 단연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르켈 독일 수상이 원전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안전위원회’와 함께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 그리고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임명함으로써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정한 결론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양심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비판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윤리위원회’에는 원자력에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위원회 구성 멤버는 가톨릭의 추기경, 프로테스탄트 목사,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을 포함한 몇몇 학자, 소비자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 등 17명이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미란다 슈라즈는 지난 6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에서, 윤리위원회가 이렇게 구성된 이유는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전력회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정책을 이른바 관계당국이나 기업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주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새삼 극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독일 연방의회 의석의 절반이 정당별 비례대표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독일의 ‘상식’을 말해주는 증거인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회제 정당정치는 사실상 금권과두(金權寡頭) 정치를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거라는 것은 기득권층의 영구집권을 돕는 합법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선거를 폐지하고, 의회제 정당정치를 방기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행의 제도 내에서 최대한 민주주의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의 하나가 비례대표제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1983년에 독일 연방의회에 녹색당이 진출하고, 2011년에 그 의회에서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를 압도적 표차로 가결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독일사회의 일반적인 상식 이외에, 그 정치시스템이 갖는 합리성에도 기인하는 바가 컸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의석의 절반이 비례대표제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일의회에는 이익집단, 특히 기득권층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과 결정의 공간이 그만큼 확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독일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아직 불완전한 상태일지라도, 비교적 합리적인 정치시스템이 존재할 때 그 사회가 어떻게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 하나의 모범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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