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16호 2011년 1-2월호  인쇄용  

 

  지식인과 자유의 실천

  김종철

 

모든 개인의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 있지 않은가. 회화나 건축이 미술품인데, 어째서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 미셸 푸코

작년(2010년)에 우리는 우리시대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 두 사람을 잃었다. 한사람은 1월에 강연여행 중 숨을 거둔 미국의 역사가 하워드 진, 또 한사람은 12월에 이 세상을 떠난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였던 리영희.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각자의 주어진 사회적·개인적 현실에 대응하며 살았으나 그들의 생애가 그려 보여주는 궤적에는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흡사한 정신적 경향, 세계인식, 삶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그러한 공통성은 동시대인이었기에 물론 가능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지식인의 본분에 극히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사람은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의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또 한사람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온 동아시아 분단국가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지적·실천적 삶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차이였을 뿐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두 지식인의 삶에는 온갖 개인적 역경과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에서 오랫동안 축적되고, 전승되어온 보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선양하기 위한 일관된 노력의 자취가 역력히 드러난다. 지식인이란, 간단히 말하면, 보편적인 인간가치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성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식인의 일차적인 과업은 가능한 한 철저히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이 이 과업을 방기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이 지켜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식인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심히 허망하고 누추해지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하여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는 하워드 진은 뉴욕 빈민가의 유태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책 한권, 잡지 하나도 구경할 수 없었던 가난한 집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문학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성장했고, 청년기에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유럽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다음에 그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전쟁 중에 자신이 네이팜을 포함한 폭탄을 투하했던 지역을 찾아가보았다. 그때 그는 미군당국이 발표했던 것과는 달리 네이팜탄 투하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또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에 대하여 자행된 무자비한 공습이 대부분 실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군부 지휘관들의 개인적 출세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무고한 인명을 학살하고도 정부와 군부는 언제나 ‘불가피한 사고’ 혹은 ‘부수적 손상’이라는 용어를 태연히 쓰면서 진실을 호도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 발견으로 ‘국가’에 대한 그의 순진한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옛 유럽전선 재방(再訪) 경험은 확실히 하워드 진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타고난 자질 탓이기도 했겠지만, 정의에 대한 그의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끝없는 동정적 관심의 뿌리에는 전쟁 중에, 비록 군(軍)의 명령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그가 저지른 살상행위에 대한 쓰라린 죄책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 하워드 진의 일생은 평생에 걸쳐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1960년대부터 흑인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민권운동, 여성 및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시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서는 최전선에 서서 미국의 전쟁범죄를 끊임없이 규탄했다.

베트남전쟁 동안에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하노이를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확인한 다음에, 《철병(撤兵)의 논리》(1967)라는 책을 써서 베트남에서 왜 미군이 즉각적으로 물러나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의한 침략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국정부의 논리는 패권주의적 지배를 은폐하는 기만적인 언어일 뿐이었다. 촘스키의 기억에 의하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기본적으로 범죄적이며 따라서 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발언한 최초의 미국 지식인이 하워드 진이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전쟁수행을 규탄했다고 해서, 한국의 리영희가 감옥으로 가야 했듯이, 하워드 진이 감옥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기본적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 치하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워드 진의 행동이 쉽게 용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훨씬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FBI는 그에 대한 파일을 작성하여 “국가안보에 대한 큰 위험요소”로 분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사회도 그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촘스키는 하워드 진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철병의 논리》가 출판되어 나왔던 당시에 이 책에 대한 단 한편의 리뷰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워드 진의 단호한 메시지가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늘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쩌면 일반 시민들보다도 더 국가가 만들어낸 신화(神話)나 ‘국익’이라는 상투적인 관념 속에 안주하는 편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영희나 하워드 진은 결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외신기자 리영희가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냉전시대의 폐색상황이 강요하는 지적 불구화와 사상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고투였고, 그 덕분에 한국사회는 적어도 정신적인 호흡정지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영희는 자주 그가 바라는 것이 단지 “상식이 통하고,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사회가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불려도 좋고, ‘인간적인 사회주의’로 불려도 좋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결코 도식적인 도그마에 매달려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하워드 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였으나, 그가 믿는 사회주의란 “소련에 의해서 그 이름이 오염되기 이전의”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좀더 친절하고, 좀더 부드러운” 사회를 뜻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사회란 사람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사회,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생산을 하는 경제시스템”이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생애 마지막 무렵에 행한 발언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리영희는 거의 최후의 공식 인터뷰에서 자신이 평생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었으며,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언제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하워드 진 역시 자신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느낌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말할 것도 없이, 그 희망은 ‘진실’의 힘에 의해 발효되고 배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식인이 진실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말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 개인의 삶을 위엄있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지식인이 자기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지식인

리영희나 하워드 진과 같은 지식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간절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그들이 보여준 강인한 정신과 양심적인 행동을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 나라 안팎의 상황은 한마디로 벼랑끝이다. 세계는 인류 전체가 합심하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고, 우리사회는 민주주의가 어이없이 망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은 단지 선거에 의해서 집권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자기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채, 시민들의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국가기구를 철저히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전락시키면서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원리인 삼권분립마저 사실상 무력화시켜버렸다. 그 결과 이 사회는 지금 행정부 수장의 권력만 활개를 칠 뿐, 독립적인 입법, 사법이 존재하지 않는 흡사 식민지사회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 정부는 연평도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지난 이십년간 애써 구축해온 남북간 화해·협력을 기조로 한 평화구조를 관리하는 데 극히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상심하고, 무력감 내지는 좌절감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질 수 있느냐며 분노와 슬픔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 이러한 무력감, 좌절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가 심각히 손상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전부 예외없이 민주주의가 회복돼야만 제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나라의 현재와 장래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4대강 보호문제와 남북간 화해·협력체제의 재구축이 그렇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현재의 집권세력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권력남용이 상당수 국민의 동조 내지는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회에서 대중의 지적 수준이나 정치적 교양에 관련하여 궁극적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학자, 전문가, 언론인, 즉 지식인들이 결국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4대강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해온 소수의 학자, 전문가들의 노고를 잊을 수는 없다. 사실 이들의 양심적이고 성실한 노력 덕분에 그나마 종교계, 시민운동가, 일반 시민들이 정부에 4대강 공사의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빠른 속도로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결국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대의견을 학계의 극히 일부 의견일 뿐이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학자·전문가치고 4대강 공사의 무모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말은 안하고 있지만, 멀쩡한 강이 단순한 수로(水路)로 변형되고 있는 이 사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목·수문학을 비롯하여 관련학계가 전부 나서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개인 자격으로, 또 학회의 이름으로 나서서 이 공사의 부당성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말해야 한다. 공학자만이 아니라 물리학자, 생물학자, 법학자, 정치학자, 인문학자들이 모두 나서서,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공사는 나라 전체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올 어리석은 만행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발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 전문가들이 말한다고 해서 귀담아 들을 권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촘스키가 말했듯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준다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무익한 노력”일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들을 마음이 없는 귀에 무슨 말을 한들 들어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발언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발언에 의해 권력자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워드 진이나 리영희가 개인적 삶을 희생하면서 ‘진실’을 끈질기게 천착한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자기반성을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국가권력의 남용에 의해서 우리사회에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4대강 문제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얘기지만, 4대강 공사는 대운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을 일절 거부한 채, 정부는 수질개선과 홍수방지라는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말만 되뇌며 서둘러 강과 유역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열중해 있다. 대체 강바닥을 다 파헤쳐놓고, 모래톱과 여울과 수변생태계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수질정화의 자연적 기능을 온통 망가뜨려놓은 다음에 어떻게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인가. 국민 전부를 바보로 여기지 않는다면 감히 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사라지는 농경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세월 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강변 둔치는 옥토 중의 옥토이다. 그 둔치들이 지금 무참히 잘려나가고 있다. 또한, 수많은 농지가 준설토 적치장으로 변하면서 농지로서의 기능상실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도 못 볼 노릇이다. 정부가 예상하는 대로 몇년 후에 과연 이 농지들이 농지로서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실은 매우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이라는 아마도 급조한 것이 분명한 이름으로 정부는 농지를 훼손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우리나라는 자원빈국이라는 상투적인 말은 따져보면 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자원이 없기는커녕, 우리나라야말로 원래 좋은 기후, 비옥한 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생존·생활조건이 갖추어진 천혜의 자원부국이다. 자원이 없다는 것은 예컨대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지만, 석유시대는 지금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농사도 석유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 구조가 걱정이지만, 어떻든 이 구조는 바뀌어야 할 것이지 언제까지나 석유를 믿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탈석유시대를 대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땅을 최대한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석유시대가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경제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우리의 논밭 하나하나는 그 어떤 유전(油田)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나 정부 사람들이 사태의 진상을 모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합리적인 설명을 끝끝내 거부하는 것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지식인들은 시민들을 위해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지금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합리적 의사소통 공간의 재생을 위해서 지식인들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은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민주주의의 소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에서 민주주의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회복 없이는 4대강을 보호한다는 것도, 남북간 화해·협력체제 구축을 통해서 평화구조를 확립한다는 것도 사실상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자유의 실천, 자기배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더 많은 지식인들에 의한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기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최근에 출판된 책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를 읽어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천안함 침몰사건에 관련하여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내용에 드러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온 재미 물리학자 이승헌 교수가 쓴 일기체 기록이다. 그는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 시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거의 매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매우 귀중한 역사적 증언을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과학자들이 대부분 과학연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별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국가나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과학을 단지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다운 삶에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을 보호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모략이 아니다.

이승헌 교수의 책에는 천안함 ‘피격’의 증거로 정부 측이 제시한 결정적 자료, 즉 ‘1번 표시 어뢰추진체’의 신빙성 여부를 밝히는 과학적 검토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과학계의 동료, 선후배, 스승들에게 이 작업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는 이승헌 교수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있고, 또한 그 호소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과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한결같이 동참불가라는 것이다. 끝내 답변을 주지 않고 침묵을 고집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이승헌의 실험결과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두려워서”, “해봐야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답변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빠져있는 가장 큰 함정은 역시 국익이라는 관념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침묵이나 회피가 결과적으로는 ‘국익논리’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기는, 안락한 연구실 환경에 익숙한 오늘의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성가신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이 범인이라는 정부와 극우언론의 ‘결론’을 거스를지도 모를 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면 사실 불안할 것이다. 게다가 연구비 생각을 하면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승헌 교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이 문제의 ‘1번 어뢰추진체’가 결국은 출처불명의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용기있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해외 거주 과학자들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해외 거주 과학자라고 해서 모두 과학적 양심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늘의 현실에서 예외적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실력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승헌은 그의 일기 속에서 극히 부실한 증거를 가지고 국제사회를 설득하려 한 정부의 무모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감추어야 할 치부를 갖게 된 한국정부가 앞으로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경제적·도덕적 손실을 끼칠 것인가”라고 탄식한다. 이러한 고뇌는 정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고결한 인간이 아니면 기대할 수 없다. 상투적인 국익논리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정신적 자세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적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 일찍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서 진지하게 물었던 루이스 코저는 《지식인과 사회》(1965)라는 고전적인 저서에서 “오늘날 대학교수를 지식인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들의 시야가 너무나 좁다. 그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신랄한 말은 그대로 오늘의 한국 대학사회에 적용하더라도 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지식인이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사회적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지식인 자신이 위엄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한, 그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고자 한다면 그 자유는 실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자유의 실천이야말로 아마도 공자가 말한 인(仁)의 실천이며, 철학자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김종철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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