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14호 2010년 9-10월호  인쇄용  

 

  대지(大地)로 회귀하는 문학

  김종철

 

제가 오늘 일본소설 한권을 가지고 왔는데, 이 소설을 중심으로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픈 미나마타》라고 번역되어 나온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고해정토(苦海淨土)’예요. 이시무레 미치코(石牟?道子)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참 좋은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읽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 작가야말로 ‘새로운 작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근대의 일본문단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죠. 그런데 모두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 작가들이에요. 한국문학의 경우도 대학출신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일본의 근대문학은 거의 완전히 대학 출신, 그것도 소위 명문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돼왔어요. 이것은 근대 일본문학의 큰 특징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지식인 중심의 이야기, 엘리트 특유의 세계인식이나 자의식이 지배하는 문학이 주류를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어요. 나쓰메 소세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있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비하면 이른바 사소설이냐 아니냐 하는 구별은 부차적인 거예요. 거의 모든 작가들이 극히 엘리트적인 언어, 서구화된 논리와 이성적인 언어로 세상을 보고, 인간경험을 보는 공통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반서구적인 논리를 펼 때도 마찬가집니다. 전통적 일본정신의 부활을 외치면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을 때 군국주의 프러시아 장교복 차림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미시마는 천황주의자이되 굉장히 서구화된 엘리트였습니다.

일본문학의 이런 경향은 지금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높이 평가하는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나 재일조선인 작가들은 예외인 듯하지만, 따져보면 그들도 결국은 엘리트 작가예요. 좀더 주변부의 소외된 삶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비판정신에 있어서는 돋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비판적 정신 역시 엘리트의 언어와 논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엘리트 문학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봐야지요. 문제는 이게 시효가 끝났다는 거예요. 사실, 일본이 1960~70년대를 거치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계보를 이어받는 엘리트 작가들의 임무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고도경제성장에 의해서 소비주의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엘리트 작가들의 진지한 작품이 설 자리가 없다는 단순한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고도산업사회가 된 상황에서 근대 초기의 비판적 지성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사의 큰 역설의 하나는 서구화·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서 성취해낸 순간 그 결과가 바로 수습하기 어려운 재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일 수 있는데, 어쩌면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심하게 앓아온 동아시아 사회가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제구실을 하자면 이런 역설을 직시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근대문학의 오랜 습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우리가 문학이라고 생각해왔고, 문학이라고 배워왔던 모든 것이 사실은 근대주의 논리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근저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오히려 이런 맥락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거예요.

길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예외적이라고 생각되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시무레 미치코예요.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근대의 엘리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면, 이시무레는 그 근대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묻는 작가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도성장 이후의 대표적인 작가가 아닌가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는 사실상 문학다운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그가 이시무레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문학의 역사적, 문명사적 의의를 간파할 시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좀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시무레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어요. 일본어 실력이 짧아서요. 현대 일본어로 쓰기는 하지만, 기층민의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대략 분위기와 느낌으로 짐작하는 정도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영문학 공부한답시고 한 게 그런 식이었어요. 대충대충 읽었어요. 순전히 글자로만 배운 외국어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요. 하층민의 구어 같은 건 정말 파악하기 어렵죠. 그렇지만 기분이 통하면 알아볼 수 있어요.

현재 이시무레의 작품은 몇편이 서양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서양인들 중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꽤 있어요. 그런데 그런 서양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일본 독자들도 사실은 별로 믿을만한 독자들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독자들은 대개 이시무레를 공해문제에 민감한 작가 정도로 보고 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실은 전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작가이거든요.

아까 이 소설의 제목이 원래 ‘고해정토’라고 말씀드렸죠. 한국의 요즘 젊은 세대가 한자를 거의 모르니까 출판사들이 책 제목에 한자 쓰기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제 생각엔 한글전용정책의 후유증이 심각한 것 같아요. 왜 귀중한 한자 유산을 다 버리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한자를 옛날처럼 기본적인 것이라도 익히면 적어도 동아시아 사람들끼리는 필담으로 다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동아시아의 이 귀중한 문화적 공통유산을 우리만 내버리는 것 같아서 정말 아쉬워요. 아까 얘기로 돌아가지요. 어쨌든 ‘고해정토’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무슨 말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책을 출판하면서 ‘슬픈 미나마타’라고 이름을 고친 거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제목을 변경함으로써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놓쳐버렸어요. 이것은 공해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도, 환경보호를 얘기하는 소설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더 깊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미나마타, 근대의 표상

물론 ‘슬픈 미나마타’라는 한국어판 제목에 드러나 있다시피, 이 소설은 ‘미나마타’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나마타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떠들썩하게 알려진, 근대적 산업활동으로 인한 미증유의 재앙이었습니다. 굉장히 큰 충격과 센세이션을 일으킨 역사적인 사건이죠. 사실 기본적으로는 아직도 미해결인 상태로 진행 중인 사건이에요. 1950년대 말에 터져나왔는데, 일본 규슈에 있는 구마모토(熊本)현 남단에 조그만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가로운 어촌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이 미나마타예요. 미나마타(水?)라고 할 때, 마타(?)라는 한자표기는 아마 일본에서만 쓰는 것 같아요. 우리 옥편에는 안 나옵니다. 일본어로 ‘마타’라는 건 강줄기나 바다 물길이 갈라지는 곳을 뜻한다고 해요.

미나마타사건은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이 대체 산업화가 뭔지, 산업문명이 뭔지, 채 실감도 하기 전에 터져나온 가공할만한 산업재해였습니다. 그 미나마타의 바다를 끼고 조업하고 있는 일본질소비료회사가 수십년 동안 산업폐기물을 그 만(灣)으로 유출시켜왔던 거예요. 화학비료를 만드는 공정 중에서 나오는 유기수은을 그냥 바다에 방류해왔던 거죠.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점점 쌓여서 그 연안바다에 사는 해양생물들의 생체 속에 계속 축적이 되었고, 그걸 일상적으로 먹었던 어부들, 주민들 그리고 짐승들이 그 독성물질의 피해를 입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고양이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상하게 몸을 비틀고 춤을 추면서 바닷물에 텀벙 빠져 자살을 하는 일들이 속출하더니, 드디어 사람들에게 언어장애가 생기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중추신경이 마비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그런 사태들이 벌어진 겁니다.

1956년에 비로소 그게 모두 유기수은중독 증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것을 질소비료회사와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또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15년이 넘게 걸려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개개인들에 대한 배상문제를 두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해야 했어요. 그게 실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항상 이렇습니다. 병든 환자나 그 가족이 비료공장의 수은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사실 없어요. 정황증거일 뿐이죠. 사람이 병에 걸리는 원인은 수없이 많아요. 같은 환경, 같은 조건 속에서 살아도 체질이 다르면 병에 안 걸릴 수도 있어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주나 정부는 늘 이런 근본적인 약점을 파고들어서 오리발을 내미는 게 아주 상습화되었어요. 명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어려우니까 재판과 배상문제가 한없이 질질 끄는 거예요.

국가와 기업은 오리발을 내미는 게 뿌리깊은 체질이에요. 어디서나 그래요. 이런 사건들이 세계 전역에 걸쳐서 지금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어요. 늘 피해자들은 당하기만 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받더라도 너무나 늦게 그것도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받는 게 고작이에요. 산업사회라는 시스템은 이렇게 늘 약자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괴물입니다. 

어쨌거나 미나마타사건은 시기적으로도 선례가 없는 탓도 있고, 사진으로 보아도 그 환자들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세계 각지에서 저널리스트들이 몰려들어와 취재도 하고, 아주 저명한 사진작가들도 장기간 상주하면서 기록사진을 찍고 그랬습니다. 저도 학생시절에 이 뉴스를 듣고, 사진도 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젊었을 적에 들어서 그런지 그 인상이 강하게 뇌리에 박혀서 지금도 산업재해라고 하면 이 미나마타부터 먼저 떠올라요.

일본질소비료공장이 창립된 것은 1901년이라고 합니다. 그 자회사가 예전에 우리나라에 있었어요. 식민지 조선 땅에 있던 흥남질소비료회사예요.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라는 사람이 설립한 회사죠. 압록강을 막아서 물길을 바꾼 다음 댐을 세워서 수력발전소까지 만든 게 바로 이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아주 스케일이 컸던 사람이죠. 아마 당시에 물길 바꾸면서 별로 조사 같은 것도 안하고 밀어붙였겠죠. 이명박의 대선배인 셈이죠.(웃음)

그런 사람이 조선 땅에 또 질소비료공장이라는 거대공장을 세웠어요. 그 공장의 정식명칭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로 돼있어요. 1927년에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면 운남리 1번지에 자본금 1천만엔으로 설립이 되었습니다. 원래 어촌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죠. 그런데 이 회사가 용지를 매수할 때 경찰관 입회하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얘긴데, 작가가 조사를 해보니까 1937년에 일본질소비료공장에서 편찬한 회사 역사책이 있었어요. 그걸 뒤져보니까 그렇게 나와있다는 거예요. 역사책이라는 것은 아주 거짓말은 못하잖아요. 왜곡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초적인 사실은 적을 수밖에 없죠. “경찰관 입회하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은 결국 주민들의 저항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죠. 당시 공장부지가 들어서던 땅은 조선인 가옥 30호 정도가 있었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거의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있었겠지요. 바다에서 고기 잡고, 땅에서 작물을 길러서 말이죠. 이시무레는 조선사람들의 토지 매수에는 여간 복잡하고 성가신 문제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거의 틀림없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주민들을 쫓아냈겠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용산참사의 역사는 뿌리가 깊어요. 국가와 결합한 자본가에 의한 토지수용 때문에 풀뿌리 민중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류 역사에서는 이런 문제가 늘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에 불과해요.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그래요.

지금도 그런데,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함경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이런 일이 무슨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그 당시 언론이라는 것도 제약이 많았을 것이고, 작가라고 해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달픈 시절이었으니까요. 세월이 많이 흐른 뒤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다시 음미해본다는 게 중요하죠. 미나마타사건을 다루는 도중에 식민지 조선 벽지의 민초가 겪었을 운명을 이 작가가 떠올려보는 것은 그게 본질적으로 미나마타 백성들의 운명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광독사건과 다나카 쇼조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시무레의 이러한 근대문명 비판에는 중요한 사상적 배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걸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몇번이나 언급하고 있어요.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일본이 근대국가체제를 굳혀가던 지금부터 100년 전쯤, 러일전쟁 무렵에, 아시오 구리광산(足尾銅山) 광독사건(鑛毒事件)이라는 게 있었어요.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고, 또 전쟁까지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리는 매우 요긴한 광물이었습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지만, 무기를 만드는 데도 구리는 필수적이죠. 나중에 일본의 큰 재벌이 된 후루카와(古河)라는 사람이 당시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아 구리광산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합니다. 옛날부터 구리를 채굴하던 광산이었지만, 이제는 대규모 근대적 광산시스템을 도입한 거죠. 그런데 구리가 독성이 굉장히 강한 물질이잖아요. 대량생산체제가 갖추어지자 광산 아래 마을들에서 아우성이 일어납니다. 구리의 생산과정에서 유출된 독성물질로 농작물이 말라 죽고, 병들고, 게다가 한번씩 홍수가 나면 범람하는 물을 통해서 그 광독이 인근 지역까지 퍼져서 광범위한 재해를 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해도 당시 전쟁을 수행하고, 빠르게 산업시스템을 건설하던 일본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쉽게 묻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지금도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것은 한사람의 지독한 투쟁 덕분입니다.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라는 인물인데, 혹시 들어보셨어요? 일본 근대사상사에서 꼭 언급되는 인물인데,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요즘 동아시아공동체에 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깊이 공부해보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싫으나 좋으나 근대적 국민국가라는 틀을 넘어가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 정말로 존경할만한,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기억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해요. 

다나카 쇼조는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초기에는 유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유교적 윤리를 체득하고 성장한 사람입니다. 본래 성격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인적인 면모가 강했다고 그래요. 청년시절에 이미 마을에서 관리들의 부당한 행패, 부조리한 행정 같은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저항하다가 옥살이도 몇차례나 했어요. 그런데 옥살이를 하면서 기독교를 발견했어요. 우연히 성서를 읽은 다음에, 읽고 또 읽고서는 크게 감복하고 평생 두터운 기독교신앙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교와 기독교라는 두개의 세계관이 한 인물 속에서 혼합된 셈이지요.

그런 양반이 아시오 광독(鑛毒)사건을 물고 늘어져요. 죽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 국회활동 전부가 이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시의 분위기에서 굉장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을 그만두라는 얘기이고, 근대국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라는 요구일 수도 있으니까요.

당시 일본 국회는 제국의회였어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라의 주인이 천황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제국헌법에 의거하여 성립한 국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엉터리 헌법이라 하더라도, 헌법은 헌법이에요. 헌법이라는 이름을 듣자면 최소한의 합리성과 논리를 갖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다나카 쇼조는 바로 이런 헌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신민(臣民)들의 삶을 편하게 하고, 신민들의 생명권을 보장한다는 게 헌법의 요지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이 제국헌법의 논리에 근거하여 물고 늘어져요. 그는 일본국민이 모두 하루도 빠짐없이 헌법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시오 광독사건은 백성을 사랑하시는 천황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위반이다, 그러니 책임자를 처벌하고 구리광산을 폐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도저히 이런 주장을 들어줄 수 없죠.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 광산재벌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있지만,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곳이었으니까요.

이른바 국익과 민익(民益), 즉 국가의 권리와 민중의 권리 사이의 대립이 이 다나카 쇼조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극한적으로 드러난 셈이죠. 그러다가 결국 국회에서 자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국회의원직을 내던져버려요. 그리고 곧장 광독 피해를 당하고 있는 마을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정부에서는 이 사람이 하도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니까 편법을 써서 광산 아래 마을들을 국가에서 수용을 해서 저류지(貯留池)를 만들려는 계획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광산의 독성물질을 가두어두겠다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마을은 수몰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다나카 쇼조는 수몰 위기에 처한 마을로 직접 들어가 거기서 버티면서 마을을 철거하려는 당국에 맞서 싸워요. 그리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그 마을에서 결국 생애를 마칩니다.

그런 투쟁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1901년 12월 10일, 육십이 된 나이에 천황한테 직소(直訴)를 했어요. 일본에는 아주 예전부터 직소라고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해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공의(公義)를 위해서 봉건영주라든지 번주(藩主)와 같은 통치자에게 중간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아뢰는 행동이지요.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결국 통치자나 그의 참모들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는 일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통치자를 비판하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서 직소를 듣고 그 내용이 합당한 경우에는 일을 바로잡은 뒤에도, 통치자는 직소를 올린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는 거예요. 그게 일본의 오래된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하극상이라고 간주한 거지요. 그런 전통을 다나카 쇼조가 모를 리 없지요. 아닌 게 아니라, 나중에 밝혀진 거지만, 그는 직소를 결행하기 전날 가족 앞으로 유언장 비슷한 것을 작성해두었어요. 그러고는 마침 천황의 행차가 예정되어 있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천황의 수레가 다가오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상소문을 들이밀었어요. 순간적으로 경비병과 뒤엉켜 길바닥에 나둥그러졌어요. 이게 언론에도 보도되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어요. 천황도 물론 그 현장을 보았겠지요. 나중에 전직 국회의원인데다가 사사로운 행동도 아니라는 게 확실하니까 천황이 특별히 용서를 해서 처벌은 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 일이고, 원래 직소를 결심했을 때 그 자신은 죽음까지도 각오했던 거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글도 많이 남겼습니다. 전집이 수십권 정도로 정리돼 나와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실 우리가 보면 별것 아닌 인물들도 온갖 기록을 다 모아서 전집도 만들고, 사상가로 기리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이 다나카 쇼조는 지금 읽어보아도 대단해요. 글이 힘이 넘쳐요. 대사상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아요. 전문적인 문필가도 아니고, 책상에 정좌해서 글을 쓸 여유가 있는 생애를 보낸 사람도 아니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그때그때마다 기록하고, 매일매일 일기를 충실히 썼던 것 같아요.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그는 이미 근대문명의 궁극적인 방향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대로 간다면 파국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해요. 그리고 근대국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산업자본과 결합되어 민초들에게는 혹독한 폭력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는 그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서 일본국민이 전부 매일 헌법을 읽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때 근대문명의 핵심적인 어둠을 꿰뚫고 있었어요. 그의 생각으로는 “참다운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고,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래의 문명을 야만으로 돌리는” 근대문명은 실은 “허위 장식이며, 사욕(私慾)이며, 노골적인 강도(强盜)”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보다도 몇십년이나 앞서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훌륭한 선각자가 있었기에 나중에라도 그 정신을 잇는 작가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민중의 역사와 기록

여기서 조금 다른 얘기지만, 누구랄 것 없이 우리는 기록들을 잘 안해요. 아까 흥남질소비료공장 얘기를 했지만, 그런 사건이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해왔을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지금은 하도 많이 겪었으니까, 사람들이 그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물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여튼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발전이니 진보니 하는 게 구체적인 민중의 현실에서는 풀뿌리공동체의 파괴로 나타난다는 것은 대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 식민지 조선, 시골마을에 어느 날 난데없이 비료공장을 짓는다면서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심경은 어떠했겠어요? 그런 날벼락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 그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없어요. 문학의 종언이다 뭐다 그런 데 신경쓰지 말고,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우선 그런 얘기들을 기록하는 데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가 작가회의 회원들이 모인 자리니까 한마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은 ‘한국작가회의’라고 하지만, 원래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고 불렀잖아요. 그런데 명칭을 변경할 때에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한 나라의 중요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회의체라고 하는 단체가 자신의 명칭을 바꾸면서 투표를 해서 바꾼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긴지 모르겠어요. 저는 참석해본 적도 없고, 작가회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명색이 문학인들의 조직이라면 역사적인 문장이 나와야 되지 않겠어요? 이 시점에서 왜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은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당당한 문장으로 논쟁을 하는 게 옳지, 그냥 손쉽게 투표라는 형식을 빌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학인들이 할 행동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는 역사적인 문헌을 남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자각이 중요해요. 결과적으로 어떤 명칭이 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기록과 문건을 너무 등한시한다는 게 문제예요. 지금에 와서 왜 민족이라는 말이 어색하거나 부적합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그 상황을 깊이있게 점검하고 토의한다는 게 중요하잖아요.

바로 얼마 전에, 문학예술위원횐가 하는 데서 작가회의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답변을 요구했을 때도 그래요. 촛불집회 참석여부를 문제삼아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느니 말겠다느니 하는 행위는 물론 유치하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렇지만 이걸 그냥 욕이나 하고, 화를 내는 것으로 대응해서는 안되잖아요. 품위있는 글을 써야죠.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 나라의 양식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둬야죠. 시인은 시만 쓰고, 소설가는 소설만 써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착각이에요. 좋은 시인, 좋은 작가는 잡문을 쓰는 사람입니다. 노신(魯迅)을 보세요. 거의 전부가 잡문이잖아요. 노신의 글 가운데 우수한 창작은 몇편 안되잖아요. 우리가 노신을 보면서 감탄하고 배우는 게 다 그의 ‘잡감문(雜感文)’ 때문이에요. 이 잡감문이 아니었다면 노신이 중국의 혼돈과 어둠에 맞서서 그처럼 가열하게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록이 없으면 결국 역사가 없는 민족인 거예요. 《조선왕족실록》 가지고 너무 좋아할 것 없어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민중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5년 전에 학교에서 나와버렸지만, 영남대에 있는 제 동료들이 ‘민중생활사’라는 기획단을 조직해 가지고 몇년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근현대의 우리나라 민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걸 재구성해보려고 노력해왔어요. 더 세월이 지나면 완전히 망실돼버리니까 지금 고령인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취를 한 거죠. 과거에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이발사도 하고, 유랑극단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동대문에서 설렁탕을 팔기도 했던 사람들의 생애를 채록해보려는 작업이지요.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런 구술을 통한 역사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녹음된 것을 풀어서 지금 책을 간행하고 있는데, 저도 조금 읽어봤어요. 재미도 있지만, 문제가 많아요. 구술사(口述史)라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제일 큰 문제가 고령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회상하면서 끊임없이 미화한다는 점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진정한 민중생활사를 보기가 힘들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리의 정신문화라는 게 굉장히 빈곤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게 그거죠.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엘리트들만이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조선시대 말기부터 식민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았던 민초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역사예요.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정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에 와서 생활했던 몇몇 선교사들의 기록이 고작이에요. 조선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어요.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런 것들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겠죠. 지금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민중의 얼굴’을 잘 몰라요. 그러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인이 민중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모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책 《슬픈 미나마타》를 보면서 느끼는 게 그런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정말 이시무레 미치코 같은 경력과 관심과 열정을 가진 작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밑바닥 민중의 삶과 내면을 이렇게 리얼하게 그릴 수 있겠느냐? 저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자료가 없어요. 지금 농촌이나 어촌에 가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보세요. 이미 도시사람 이상으로 도시화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 같은 것 때문에 이제는 방언 쓰는 사람들도 드물어요. 그런데 왜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냐 하면 근대적인 가치로는 이제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탈근대주의니 하며 학계와 지식사회에서 요란하게 떠돌아다닌 것은 지식인 엘리트들 몇몇의 머릿속에서 나온 추상적인 논리일 뿐, 전혀 생명력이 없는 거예요. 요새는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풀뿌리 포스트모더니즘이에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도 필요없어요. 원래 풀뿌리는 삶 그 자체가 비근대적 가치세계 속에서 쭉 영위되어왔으니까요.

 

도(道)의 실현과 근대국가

이시무레 미치코는 이 비근대의 논리에 아마도 가장 철저한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슬픈 미나마타》는 단순한 반(反)공해 소설이 아니에요. 원래 이 작품은 소설 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이게 1969년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이 작품을 논픽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때 무슨 문학상을 받았는데, 논픽션부문의 수상작품으로 선정되었어요. 그렇게 기성문단의 오해를 살만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보았듯이 흥남질소비료공장에 관한 회사 측 자료로부터의 긴 인용이라든지, 미나마타병 환자들에 관한 병원의 진단기록, 의사들의 증언내용, 회사 측이나 당국자, 정치가, 언론들의 이 문제에 관한 발언, 보도내용 등등을 사실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 부분이 꽤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7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은 피해자 개개 인물에 관한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들 이야기를 꿰뚫고 있는 것은 ‘미나마타’의 문명사적, 인류사적 의미에 관한 집요한 천착, 근원적인 질문이에요. 미나마타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는 남녀노소가 다 들어있고, 심지어 태아까지 감염되어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로서 비참한 인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런 희생자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개인마다 얽혀있는 사연을 주의깊게 듣고,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그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순서도 뒤바뀌기 일쑤고, 비현실적인 신화, 꿈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서 어느 것이 현실인지 몽환의 세계인지 잘 구별이 안될 만큼 뒤섞여서 전달되고 그래요. 그런데 이런 기법은 가령 서양의 현대소설에서 배운 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땅의 민초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중에 밝혀진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보면 마치 작가가 희생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꼼꼼히 취재한 것을 나중에 살을 붙여서 재구성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작가의 출신배경에 대해서 좀더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해요.

이시무레의 고향, 구마모토(熊本)는 일본에서도 좀 특이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자본주의국가로 빠르게 돌진해가던 정치·문화의 주류에 대항하여 본원적인 인간가치를 지키려 했던 이상주의적 사상가, 실천가들의 근거지의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교과서에서는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로 기록하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도 이 구마모토와 인연이 깊어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원래 사츠마(薩摩)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츠마번은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지방으로, 구마모토와는 지척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나중에 메이지 신정부에서의 직책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나와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라는 반정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구마모토는 그의 주요 거점이었고, 또 그가 최종적인 패배를 당하고, 자결을 한 곳도 구마모토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인물이 참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단순한 정한론자라고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사실 요즘 일부에서는 그를 정한론이 아니라 오히려 견한론(遣韓論)을 주창한 사람으로 봐야 더 정확하다는 견해가 있어요. 당시는 조선과의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이 유신정부의 최대 현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정부가 ‘천황’이라는 표현이 가당치 않다고 일본 쪽의 외교문서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사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시는 아직 새 국가의 틀을 잡는 데 경황이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기록을 보면 일본정부에서는 조선과의 관계가 꽉 막혀있는 게 굉장히 고민거리였던 것 같아요. 국가체제가 근본적으로 변경되었고, 이걸 이웃나라에 통보를 해야겠는데, 이게 안되니 심한 가슴앓이를 한 거죠.

물론 당시 막번(幕藩)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몰락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컸고,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조선침략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역사가들도 흔히 그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정한론이라는 것은 그때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몇몇 특정 인물에 국한된 논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사이고 다카모리는 우리가 정한론자라고 할 때 쉽게 연상하는 그런 호전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는 외교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정부의 최고 실권자인 자신이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갔다 오겠다고 견한사(遣韓使)를 자청했던 거죠. 그런데 이게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들 사이의 권력 헤게모니 쟁탈이라는 복잡한 역학관계 때문에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메이지유신 10년째 되는 해에 사무라이들의 반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심 때문에 이 반란을 지도한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세이난전쟁 자체는 확실히 이른바 불평사족(不平士族)의 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분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은 이 전쟁을 사전에 면밀히 준비하거나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의 논리에 의해서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결국 반란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패배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걸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런 행동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한때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앞장을 섰고, 그 결과로 신정부의 최고 실력자 지위에까지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그 지위를 버리고 귀향해서는 자신이 세운 정부를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그 전쟁은 아무 승산도 없는 전쟁입니다. 모순덩어리죠. 왜 그랬을까요? 물론 그 인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죠.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우선 그는 시대의 추세로 볼 때 구체제의 붕괴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온몸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국가체제가 단순히 서양식 물질문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道)’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서는 유학의 민본주의 이념에 충실한 매우 양심적인 사무라이의 체취가 느껴져요. 그래서 자신의 희망과는 자꾸 멀어지는 현실 속에서 점점 낙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동료들, 즉 신정부의 권력자들이 개인적인 사치를 한다거나 동경 거리를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고 지나가는 모습을 굉장히 역겨워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인물은 낭만적인 혹은 몽상가적인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희망이나 이상과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는 현실의 정치, 즉 근대적 자본주의 독재국가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자신이 논리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그는 이미 근대국가 형성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 이 근대국가 체제의 근본적인 ‘어둠’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근대국가와 ‘도(道)’는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통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의 대세를 막을 도리는 없죠. 거기에 그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상의 원점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죽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은 뒤에 이상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맥은 잠복된 형태로나마, 특히 구마모토 주변 일본의 서남지방에서, 꽤 지속되어온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전후 일본시인 중에 다니카와 간(谷川雁)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동경대학을 나온 소위 엘리트 지식인인데, 청년시절에 폐결핵에 걸려서 고향인 구마모토로 돌아와요. 그러고는 서클촌(村)이라는 문예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면서 1960년대에 신좌익운동이 한창일 때 젊은이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그의 혁명사상의 핵심이 뭐냐 하면 동아시아적 농민공동체의 복원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었습니다. 통상적인 맑스주의의 입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죠. 그는 상부상조의 원리에 의한 협동과 자치의 공동체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원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가 벌인 문예운동에 참가했던 멤버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이시무레 미치코였습니다. 이시무레는 본래 이렇다 할 학력도, 경력도 없는 여성이었어요. 예전에 실과(實科)학교라는 게 있었는데, 가난한 집 자녀들이 주로 다닌 학교였습니다. 그런 학교 출신으로 전쟁 말기에는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잠시 근무한 게 경력의 전부였어요. 그런데 어렸을 적부터 혼자서 단가(短歌)를 짓기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고, 그게 빌미가 되어 다니카와 간이 운영하는 문학교실 같은 데서 만났겠죠. 그러니까 별 볼 일 없는 시골 밑바닥 출신 아줌마가 당대 일본의 문제적인 시인을 만나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셈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와타나베 교지(渡邊京二)라는 평론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른바 재야의 지식인인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는 특히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사회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데 뛰어난 통찰을 보여줍니다. 아까 제가 사이고 다카모리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실은 대개는 이분의 책에서 본 것을 밑천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이분도 구마모토사람이에요. 평생 지방에서 살면서 한번도 대학이나 제도권 연구기관에 소속하지 않고, 독립적인 저술활동과 시민강좌를 해온 평론가예요. 그런데 이분이 젊었을 적에 작은 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그때 투고되어온 작품에서 이시무레의 천재성을 이미 알아보았다고 해요. 그 인연으로 이시무레의 문학적 성장을 옆에서 쭉 지켜본 사람이니까 작가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죠. 그래서 《슬픈 미나마타》가 나온 뒤에 한번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굉장히 내밀한 부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취재 도중에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느냐?” 그러니까 처음엔 어물어물하더랍니다. 그러다가 결국 고백을 하는데, 그 환자들이 그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아픈 사람들이 그렇게 구구절절 자상하게 이야기를 들려줄 형편도 아니지요. 작가 자신도 실은 기껏해야 작중 인물들을 한두번씩밖에 만나지 못했고, 몇마디 정도밖에 들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소설에는 굉장히 자세하게 나옵니다. 여러 해 동안 같이 친숙한 생활을 해도 캐낼까 말까 한 내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한두번 어설프게 만나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썼느냐는 추궁에 대해서 작가가 뭐라고 답변했느냐 하면, “내가 만난 그 환자나 가족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글로 옮기면, 그렇게 되는 걸요.” 그러니까 작가는 외면적인 취재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의 주인공들이 될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갔고, 그 내면에서 그들과 마음이 완전히 일치했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서, 그 환자들의 고통과 번뇌를 자신의 고통, 번뇌로 느꼈다는 거죠. 결국 무당이에요.

 

샤먼으로서의 비근대 작가

그러니까 작가는 한사람의 무당으로서 글을 쓴 거예요. 이시무레는 무당이 될만한 소질도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이 할머니가 거의 치매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해요. 어린 소녀가 집안 어른들이 다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막막함이랄까, 절망적인 고통을 그냥 몸으로 깊이 내면화했던 것 같아요. 평론가 와타나베 교지는 《슬픈 미나마타》에 대해서 “이 작품은 이시무레 미치코의 사소설이며, 이것을 낳은 것은 그녀의 불행한 의식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언젠가 와타나베는 작가생활 초기에 이시무레의 집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생활을 하는 주부에게 자신만의 서재 같은 게 있을 리 없죠. 한쪽 골방에 다다미 반장 정도의 공간에 책을 쌓아둔 채, 그 옆에 조그마한 밥상을 하나 놓고 쭈그려 앉아 글을 쓰고 있더라는 겁니다. 창문이 있기는 한데, 워낙 비좁은 공간에 책과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다 보니 대낮인데도 깜깜한 방이었다고 합니다. 식구들하고 격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 어둠의 공간이었던 거죠. 그 공간에서 이시무레는 신들린 듯이 글 쓰는 일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그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크나큰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불행한 의식’ 때문이에요.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어요. 쓸 이유가 없죠. 요즘 우리 주변에 늙어서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지만, 글이라고 발표되는 것을 봐도 다들 편하고, 한가로운 얘기들이에요. 절실한 얘기들이 아니에요.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문학이 아니죠. 예전에는 고생들 했지만, 이제는 이만큼 살게 되었노라고, 다들 편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4대강이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이른바 문단의 대가라는 분들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세요. 절망적인 기분이 없다는 증거예요.

아무튼, 이시무레에게 있어서 ‘불행한 의식’은 어렸을 적부터 싹트고 자랐던 것 같아요. 정신이든 육체든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과 애정, 이런 게 할머니와 같이 고통스럽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소녀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 거죠. 그 때문에 그는 미나마타의 희생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의 아저씨, 아주머니, 언니, 동생 같은 사람들이 오염된 바다의 물고기를 먹고 모두 죽거나 평생 장애자가 되어 괴로움 속에 살 수밖에 없게 됐다고 해서, “이제 우리는 행복한 인생이 끝장났다”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단순한 사회고발 문학밖에는 안됩니다. 반공해 소설밖에 안되는 거죠. 그러나 이시무레는 환자들의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면 의식이 굉장히 날카로워집니다. 괴로움이 깊을수록 의식은 극한적인 한계까지 가닿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극한에서 오히려 사람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명감각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한사람의 작가이자, 무당으로서 이시무레가 자신의 작중인물들을 대변해서 전하고자 한 것은 결국 이 생명감각, 생의 근원적인 행복과 풍요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생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해정토

미나마타병에 걸리기 전에 바다를 터전으로 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늘 자연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물과 흙과 공기와의 끊임없는 직접적인 접촉 가운데서 영위되었던 거죠. 그러니까 도시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생명에의 근원적인 감각이 그들에게는 살아있습니다. 민초들의 삶을 묘사할 때, 계급적 모순이나 사회적 모순을 그려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런 외면적인 접근만으로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핵심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시출신의 작가가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농촌출신이라 하더라도 쉬운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농촌현실이나 떠돌이 노동자의 삶에 관해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준 이문구 같은 작가도 이런 차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가 아무리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아무리 유연하게 접근한다 하더라도 늘 ‘흙’ 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삶과의 생생하고 유기적인 접촉이 없는 한, 근원적인 생명감각을 포착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시무레는 타고난 무당입니다. 이 작가가 미나마타의 비극 가운데서 포착해낸 것은 이 살아있는 생명감각이 빚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극한적인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가고 있는 환자들을 통해서 말하자면 고해정토(苦海淨土)의 원리를 발견한 거죠. 즉 지독한 절망과 고통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상황 말입니다. 이시무레는 치유 불가능한 병고의 고통과 절망의 한가운데서 환자들이 오히려 여태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들의 삶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몇구절 인용해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위만 안 보고 살면 더는 부족한 게 없지. 어부보다도 좋은 직업도 없지. 우리 같은 일자무식인 사람한테는 세상에서 이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거요. 우리 집에 딸린 밭이나 정원 같은 바다가 저 앞에 언제나 있고, 물고기들이 언제 나가봐도 있으니까.

밤이 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 바다야. 바다가 제일 좋았어. 봄부터 여름이 되면 바다 속에도 온갖 꽃들이 만발하지. 우리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바다 속에도 명소라는 게 있어. 빙 한바퀴 돌면 익숙해진 우리 코에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의 바다 향기가 풀풀 풍기거든. ‘회사’냄새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도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해요. 평생 신선한 생선 맛도 모르고, 햇볕도 제대로 못 쐬고, 불쌍하게 살다가 늙어가겠네. 우리가 봐도 도쿄사람들 정말 불쌍해. 도미도 청어도 물들여서 팔고 있다잖우. 그에 비하면 우리 어부들은 천하의 부러울 것 없는 생활 아닌가.

바다내음 중에서도 봄색이 짙어진 파래가 물기 마른 바위 위에서 햇볕에 구워지는 냄새라니!

기록을 보면 미나마타의 어부들과 그 가족들은 곡물은 별로 안 먹었다고 합니다. 날생선과 감자, 그게 주식이었다고 해요. 그렇게 언제나 바다생선을 물리지도 않고 먹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결국 수은중독에 걸리고 만 거죠. 환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생선을 먹은 일은 없어도, 이미 태아 때 감염되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비록 이제는 다만 기억 속에서일망정 바다를 의지해서 지내던 예전 생활에 대한 회상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고, 이 기쁨으로 환자들의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다생활이 다 즐거웠던 것은 아니겠지요. 또 이 소설에 묘사된 바다생활이 대개 환자들의 기억 속의 장면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많은 경우 현실과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바다생활이란 심한 중노동을 수반하는 삶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이 중노동이고 고통뿐이라면 그런 생활이 천년, 만년 계속되어왔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과 괴로움뿐이었다면 벌써 농경이나 어로(漁撈)는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봐야 손해만 보게 되는 상황에서도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농사나 고기잡이 일을 접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면 대개의 농민이나 어부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농민이나 어부의 노동과 생활에는 근대식 공장노동이나 도시의 월급쟁이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얘깁니다.

오늘날 한국작가들 중에서 이런 차원을 주목해서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은 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이란 말이에요. 밑바닥 노동자나 농민의 의식과 삶을 대변한다는 작가라 할지라도 대개는 이념적 갈등이나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보는 이른바 좌파적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해요. 왜냐하면 엘리트적 사고습관에 길들여진 작가가 정작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의식의 내면을 알 턱이 없으니까요.

미나마타의 어부들은 “옛날부터 도미는 임금님이 드시는 생선이라 했는데, 우리 어부들은 평생 맨날 도미 먹고 맨날 임금생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비록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찢어진 것은 기워 입고, 하늘이 먹여주신 것을 먹고, 조상을 섬기고, 신들을 받들고, 다른 사람 원망하지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자족감과 평화로운 심성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바다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이겠지요. 그들은 바다가 설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촌마을 삶의 공동체적 성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기떼가 몰려온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부들은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집을 뛰쳐나와서 어영차어영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함께 고기잡이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언제부터인가 “고기떼가 온다!”며 동네방네 퍼지던 외침소리가 사라지고 적막한 마을이 돼버렸어요. 그러고는 “입원해 봐야 대책이 없는” 병에 걸려, “평생 병신으로 살든가, 죽든가”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폐허가 돼버린 거죠. 

 

인간정신의 쇠약

한번 망가진 자연과 공동체는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망실된 삶은 돈 몇푼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시무레에 의하면, 근대국가란 기본적으로 ‘기민(棄民)’, 즉 밑바닥 민중을 내팽개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체제입니다. “산업공해가 변방의 촌락을 정점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체질적으로 하층계급에 대한 모멸과 공동체 파괴를 심화시켜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더 기막힌 것은 이 체제 밑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의 ‘비인간성’입니다. 미나마타의 비극 중에서 가장 기막힌 대목은 재해의 주범인 일본질소비료회사라는 대기업의 종업원들과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미나마타병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됨에 따라 행여 회사의 입지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환자들과 그 가족, 친지들에 대하여 몹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시민들 사이에 미나마타병 환자 111명과 미나마타 시민 5만4,000명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는 냉혹한 논리가 ‘들불처럼’ 확산되고, 시가 주최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에도 이시무레 자신을 제외하고는 일반시민은 단 한명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미나마타병이라는 현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는 모든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될 수 있다는 논리도 이 지역사회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황량한 현실’은 결국 오늘날 “인간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어떤 대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정신의 쇠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 소설에 나오는 장례행렬의 한대목을 인용해보죠. 

내 고향인 이 지방에는 한세대 전까지만 해도 … 명정 하나 세우지 못한 초라한 장례라도, 길 한가운데를 엄숙하게 행진하면 마부는 말을 멈추고, 자동차는 뒤로 물러서주었다. …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있는 동안 다소간 불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죽은 사람이 되면 숙연한 친애와 경의의 뜻이 담긴 장송의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 지금 1965년 2월 7일, 미나마타병의 마흔번째 사망자인 아라키 타츠오 씨의 장례행렬은 굉음을 울리며 연달아 질주해가는 트럭에 길을 내주고 질척한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국도의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비틀비틀 숨죽이며 … 묘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여전히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런 역설이 참 기막혀요. 인간의 손으로 세계는 벼랑끝으로 다가섰는데, 그리하여 목숨들은 도처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거나 학대받고 있는데, 세상은 변함없이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의 빛 속에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이시무레가 미나마타병으로 거의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어떤 환자를 찾아서 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묘사입니다.

1959년 오월 하순, 뒤늦게나마 내가 처음으로 미나마타병 환자를 시민의 한사람으로 병문안 갔던 것은 사카가미 유키가 있는 병실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곳곳에는 겹겹이 어지러운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진한 정기를 내뿜고 있는 신록의 산들과 정답게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미나마타강이며, 강변과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아직 꽃대에 꽃을 달고 있는 푸른 콩밭, 이런 풍경을 건너다볼 수 있는 이곳 2층 병동의 창이란 창에서는 일제히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오월의 미나마타는 꽃향기 가득한 계절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고향 생각을 했어요. 물론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고향의 풍경, 오로지 내 마음속에만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풍경이죠. 그 풍경 속에 오늘날 근대문명이라는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진 약자들이 지금 크나큰 고통을 겪으며 꼼짝없이 누워있는 것이죠.

 

강과 꽃과 인간영혼

좋은 문학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마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더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인간정신이 있고, 아무리 할퀴고 짓밟아도 끝끝내 소멸될 수 없는 근원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문학과 예술의 몫입니다.

지금 4대강이 파괴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도 현장에 한번 가보세요. 이제 우리는 강은 사라지고 거대한 수로만 존재하는 나라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강은 없어지고 수로만 있게 될 것이라는 얘기는 얼마나 참혹한 얘기예요? 그러나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을 하는 여러분은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물이 오염되고, 농경지가 없어지고, 홍수 위험이 높아지고 등등, 그런 것보다도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용인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정신에 대하여 강이 끼쳐왔던 근원적인 의미가 소멸된다는 사실일 겁니다.

결국 ‘미나마타’와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강이 주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 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산하(山河)만큼 정답고 아름다운 데가 어디 있어요? 지금 지율 스님은 강을 살릴 수만 있다면 강물에 뛰어들어서 자결이라도 하고 싶어 합니다. 지율 스님은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서 최고의 ‘시인’이에요. 강에서 얻는 무슨 공리적인 이익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강 그 자체의 신비함이 자아내는 근원적인 아름다움에 굉장히 민감한 분이에요. 그래서 강이 저렇게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을 못견뎌하는 거예요.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가 자연을 묘사할 때의 어조와 문체를 보면 그걸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꽃대를 달고 있는 푸른 콩밭, 물새가 유유히 날아오르는 강변 모래톱, 이런 것 사라지면 인간다운 삶은 끝이에요.

이시무레는 근대라는 것 자체를 ‘원죄’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도 틀린 얘기가 아니죠.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강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이 그냥 단순히 때가 되어 산란하는 게 아니라고 해요. 어떤 물고기들은 꼭 진달래가 피는 것을 보고 산란을 한답니다. 물론 생리적으로 그 시기 봄철에 산란하도록 돼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실은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물고기도 진달래가 피기를 기다리고, 진달래로 온 산천이 붉게 물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게 틀림없어요. 적어도 시인, 작가, 예술가라면 세상만물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번역한 글이 하나 있는데, 루이스 멈포드라는 문명비평가의 글이에요. 거기에 보면, 지구상의 장구한 생물진화과정에서 파충류 다음에 포유동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포유동물이 나타날 때에 동시에 지구상에 꽃이 폭발적으로 출현했다는 설명이 있어요. 저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봐요. 우리가 꽃을 보면 자연히 기쁨을 느끼고, 뭔가 생명이 고양되는 느낌을 갖는 게 일반적인데, 그것은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기본적으로 포유동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얘기죠. 이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꽃을 없애고, 식물을 훼손하고, 나아가서 모든 생물의 기초적인 서식지인 습지와 강을 파괴한다는 것은 진화생물로서의 우리들 자신의 존속을 심히 위태롭게 하는 굉장히 어리석은 행위라는 거죠.

근대의 논리를 넘어가는 진정으로 새로운 문학을 꿈꾸는 시인, 작가라면 결국 이러한 진화생물로서의 인간의 위상, 즉 만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이 살아있어야 하겠죠. 그렇게 되면 4대강의 파괴는 바로 인간다운 삶, 인간영혼의 붕괴라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려는 꿈을 간절히 꾸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문학은 몽상의 기록이자, 일종의 기도(祈禱)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상황입니다. 이런 캄캄한 상황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것인가, 얼른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슬픈 미나마타》에서 중요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철 ― 본지 발행인. 이 글은 2010년 3월 25일,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렸던 한국작가회의 주최 문학강연회에서 했던 얘기를 정리,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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