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13호 2010년 7-8월호  인쇄용  

 

  기본소득과 새로운 삶의 방식

  세키 히로노

 

지난 10년 동안 노동을 둘러싼 일본어는 점점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하였다. 종신고용을 보장받은 샐러리맨이 ‘사축(社畜)’이라고 야유를 받던 1990년대에는 신조어 ‘프리타’에는 어딘가 해방적인 울림이 있었다.

물론 젊은 프리타들 대부분은 정규 취직 기회를 박탈당하고 아르바이트생활을 강요당하는 사람들로서, 개중에는 건강보험도 없는 우려할만한 예들도 있었다.

그러나 기업사회에 대해서는 거리를 취하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노동방식을 원하여 자발적으로 프리타가 된 젊은이도 실은 적지 않았다. 그러한 젊은이들의 등장은 경제적 안정과 안락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온 일본사회가 변하고 있는 징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번 세기로 들어오면, 현재의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아무리 일해도 심각한 궁핍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와, 고용 정세(情勢) 앞에서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프리케리어트’가 새로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파견노동’이라는 무정한 말이 사람들을 떨게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는 자신의 개성에 맞는 노동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고용을 유지한다”는 게 적합한 말이 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 정세의 급격한 악화는 정부나 기업이 고용문제를 경시해온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부는 버블 붕괴 후의 경제적 정체와 혼미 속에서도 변함없이 완전고용이라는 전후(戰後)의 이상을 고집해왔다고 말해도 좋다. 경제가 활력을 되찾아 성장한다면 고용문제는 해결된다는 게 정부의 신조였다.

얼마 전, 국제노동기구(ILO)가 실업자 중 77퍼센트가 실업보험을 받지 못하는 일본의 현상은 선진국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지적하였지만, 이 안전망의 미비도 정부의 태만이 아니라 정부가 고집해온 신조(信條)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완전고용의 이상을 고집하듯이 기업도 일본적인 종신고용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경제적 곤경은 기업에 구조개혁을 강요하고 있지만, 졸업생 일괄 채용, 종신고용, 정기적 승급(昇給)과 같은 일본의 기업체제는 흔들림 없이 존속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이 전력(戰力)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규직 사원의 종신고용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 젊은이들의 진출을 막는 결과가 되어, 그들 다수는 프리타나 파견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제성장이 고용을 창출한다는 정부와 기업의 논리는 결과적으로는 안정적 신분도, 올바른 수입도 없는 반(半)실업 상태에 있는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뿐이다. 그래도 반실업 상태는 완전실업보다는 낫다는 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비정규 노동자가 노동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불안정 고용과 빈곤은 젊은이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파견노동자도 간단히 목이 잘리는 사례들에서 보듯이 불안정 고용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인 것이다.

정부와 기업의 잘못은 완전고용이라는 이상이 과거의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실업은 경기후퇴에 수반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용의 축소는 현대사회에서 기본적으로 항상적인 현실이며, 그 주된 원인은 생산의 기계화, 자동화이다. 생산의 기계화, 자동화는 자본주의의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현대는 그것이 극에 달한 시대이다. 선진국에서 자동화 기술을 완전히 활용한다면 현재의 노동력의 1/4로써 모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대부분은 잠재적 실업자이다.

그리고 글로벌화의 압력 밑에서 기업 간 경쟁이 격심해지는 것과 함께 이러한 기계에 의한 실업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자동화가 더욱 진전된다면 기업이 다수 노동자를 껴안고있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기업의 사명은 소비자들에게 양질의 상품을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지, 고용을 유지하는 게 아니다. 종업원들의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기업을 사회가 과연 용인해줄 것인가.

그런데 다른 한편, 소비자란 어딘가의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며, 그 고용에 의한 소득만이 상품의 구매력이 된다. 따라서 기업이 거액의 설비투자로 생산을 고도화하더라도 그만큼 인원을 삭감하거나 임금을 깎거나 하면 시장은 축소되며, 이것은 불황이나 공황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재적 실업자인 사회에서는 고용과 소득을 분리하여, 사람들에게 고용에 좌우되지 않는 소득을 분배하는 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한 방책은 기업에도 활기있는 시장을 가져다준다. 바로 여기에 종래의 기업 주도의 경제성장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재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 이유가 있다.

기본소득 보장이란 모든 국민에게 개인 단위로 예컨대 매월 10만엔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기본소득은 생활보호 같은 자격심사 없이 일률적으로 무조건, 빈부차도 문제삼지 않고 지급된다. 그리고 이 제도가 실시되면 현재의 복잡한 사회보장제도는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은 “지나친 복지이며, 게으른 자를 양산할 뿐”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비판은 오해에 기초해있다.

기본소득 보장은 종래의 복지국가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과제는 생산이 고도로 자동화된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경제의 교란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현대세계의 큰 문제는 자본의 과잉이며, 사용할 길이 없는 과잉자본이 월스트리트 등에 집중, 카지노경제를 형성하여 경제의 대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기본소득 보장은 자본의 철저한 분산을 통해서 경제를 안정시키는 시도이며, 그 결과 돈은 수도나 전기처럼 사람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일종의 공공인프라가 된다.

이러한 구상에 대해서는 또 “실시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이 어디 있는가” 혹은 “그런 것을 하면 인플레가 되는 게 아닌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재원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부가 중앙은행과는 별도로 스스로 발행하는 통화를 소득보장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이 방책은 국가의 부채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절실한 수요를 돈으로 지원하여 ‘유효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책이므로 인플레가 발생할 위험은 본래 미미하다. 만일 경제가 인플레 기미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체경제의 정확한 파악에 기초한 정책의 조정을 통해서 억제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 보장은 정책적으로는 완전히 실행 가능하지만, 실제로 실현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은 산업혁명 이래 사람들이 품어온 노동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현대인의 머릿속에는 노동은 생존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부과된 필연적인 것이며, 소득은 고된 노동을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사고방식이 깊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이 근대적 노동이란 것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단순한 추상적 작업량에 따라 경제학적으로 평가되는 행위이다. 오늘날 노동하는 인간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자신을 수단이나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 근대세계에 있어서는 예술가만이 이런 인격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의 바깥에 위치해있다. 그리하여 시인, 화가, 음악가들의 작업에 대해서는 노동이 아니라 창작이나 작품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런데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의 궁극적 의의는 사람들이 근대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두 예술가처럼 살고 일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데 있다.

물론 고용과 소득에 얽힌 불안이 사라지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존의 필요에 강제되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은 인격적 요구, 인간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생활은 노동, 휴식, 유희, 여가 따위로 분단되지 않고, 인간은 무엇을 하든 늘 그 인격적인 삶에 의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자발적인 프리타들이 찾던 행복은 그러한 삶에서 발견될 것이다.


세키 히로노(關曠野) ― 일본의 평론가, 사상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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