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10호 2010년 1-2월호  인쇄용  

 

  포기를 통한 행복의 추구

  김종철

 

사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

― 허버트 매케이브

‘녹색성장’이라는 거짓말

최근에 제가 몇몇 모임에서 ‘녹색국가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국가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사유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과연 국가라는 게 그 근본적인 성격상 녹색적 가치와 친화하거나 심지어 양립 가능한 것인지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지금 녹색성장이라는 말을 한국정부가 거침없이 쓰고 있는데, 한마디로 가소로운 일이지요. 어디서 녹색이라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녹색적 가치를 정책을 통해서 실천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입만 열면 녹색 운운하고 있어요. 원자력발전을 녹색에너지라고 맘대로 규정하고, 4대강과 그 유역을 전면적으로 파괴해버릴 게 확실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녹색뉴딜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심과 어긋난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경제정책에 매진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위선도 보통 위선이 아니지요. 하기는 이런 위선이나마 이 정부가 보여준다는 게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지요. 원래 위선이라는 것은 거짓이 진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행위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정부가 비록 진심이 아닐망정 녹색을 들먹이는 것은 그래도 이 정부가 정말 존중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식별력은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지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니까요. 문제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거죠. 그것도 너무나 태연히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갈수록 권력주변의 언어가 타락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 나라의 교육, 문화를 포함한 정신적·도덕적 삶의 척도가 혼란스러워지는 게 제일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녹색이라는 말을 가급적 안 쓰려고 해요. 제가 발행하는 잡지가 녹색평론인데, 녹색이라는 말이 이렇게 오염돼버린 상황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세상에는 중요한 게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말이고, 언어생활이에요. 말이 지나치게 남용되거나 오용되면, 다시 말해서 거짓말이 범람하게 되면 인간다운 삶의 윤리적 기초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지금 녹색이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해대는 사람들이 하도 혐오스러워서 그만 잡지 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참 난감합니다.

아무튼 지금 정부의 후안무치함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일하는 것마다,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마다 반녹색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인데도 불구하고, 녹색을 가장하고, 친서민 운운하니 가당치도 않지요. 그런데 이런 정부를 우리는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지만, 조금 물러나서 냉정히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 속에서 과연 녹색국가임을 진정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 국가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근대국가라는 틀 속에서 녹색적 가치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가, 혹은 근대국가의 논리와 녹색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아직 이 문제에 관해서 깊이있는 공부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섣불리 말한다는 게 두려워요. 그러나 이것은 워낙 중대한 문제이기에 부족한 실력을 돌아보지 않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앞으로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지만, 우선 여러분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의 행복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우화 하나를 가지고 말머리를 꺼내볼까 합니다. 어떤 남자가 고요한 바닷가에 앉아서 평화롭게 낚시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하는 말이,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낚싯대 하나 걸쳐놓고 고기를 잡고 있느냐고 그래요. 이 이야기 여러분들 대개 아시죠? 알고 계시겠지만, 이야기 진행상 필요할 것 같아서 되풀이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낚시질하던 사람이 묻습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던 사람이 그물을 쓰셔야지요 하고 말합니다. 그물을 쓰면 한꺼번에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지 않느냐고요. 그래서 그 낚시꾼이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가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걸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 큰 배를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원양어업을 본격적으로 할 수도 있을 거고. 낚시하던 사람이 또 묻습니다. 원양어업을 해서 뭐 할 건데요? 행인이 말합니다. 그러면 큰 수산회사 사장도 되고, 회장도 될 수 있다고. 그러자 또 낚시꾼이 묻습니다. 큰 회사 회장님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아니, 나중에 은퇴해서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느냐. 어떻게 편하게 사는데? 고요한 바닷가에 나와서 낚시질을 하면서 지낼 수 있지 않겠느냐. (웃음) 내가 바로 지금 그러고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리들이 사는 꼴이 대체로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늘 장래를 위해서 뭔가 준비를 하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단 한번도 지금 여기서 현재의 삶에 집중해서 살고 있지 않아요. 늘 준비를 하면서 진짜 삶이란 언젠가 미래에 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미래는 절대로 오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좀 보세요.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가릴 것 없이 그때그때 성장단계에 어울리는 아이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향유할 여유가 없어요.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하루에 학원 5개를 다녀야 하는 나라예요. 그래서 그 아이의 소망이 뭔가 하면 죽고 싶다는 겁니다. 죽으면 학원에 안 다녀도 되니까. 이 얘기는 녹색평론 지난호 서문에서 제가 인용했는데, 기억나시죠?

이건 예외적인 게 아니라 오늘날 전형적인 우리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아이들만 이런 게 아니지만, 어쨌든 아이들의 삶을 이렇게 망가뜨려놓은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나라 어른들 이러고도 아이들의 어버이, 보호자,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양심이 있다면 다들 석고대죄를 하든지 자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이렇게 해놓고 무슨 경제발전, 사회개혁, 통일을 한다는 거예요. 참혹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이명박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희망이라도 있지요. 다음 선거에서 갈아치우면 되니까. 또 아무리 이명박이 엉터리 짓을 하더라도 3년 후에는 어차피 청와대에서 물러나올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통령을 하고 어느 정파가 집권을 하건 이 문제는 풀릴 것 같지가 않아요.

그 문제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10년 후, 20년 후에 어른이 되거나 더 늙어서 은퇴한 뒤에 행복한 삶이 올 것이라고 막연히 기다리다가 인생을 다 망쳐버려요. 한번도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해버립니다. 일반적으로 현대문명사회 특히 산업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심한 것 같아요. 참 어려운 문제예요. 그래도 지금 우리사회에서 제일 생각을 많이 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사회운동가나 시민운동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에 거부감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마치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희생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어, 자기희생적인 행동을 존경하는 습관이 뿌리 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희생을 왜 해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게 자기희생이에요. 누가 희생하라고 했어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무슨 어려운 일을 자청해서 좀 했다고 해서 자기희생을 한 기분을 느낀다면 사실 그런 일 안하는 게 나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적지 않지요. 자기를 희생했다는 기분이 있는 이상,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뒤따르고, 그게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괜히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으로부터는 탄압을 각오해야 하고, 일반대중의 몰이해에 부딪칠 가능성을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약간의 역풍이 불어도 금방 나약한 심정이 되어 나는 나를 희생하면서 이 사회를 위해 일해왔는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치있는 사회운동이라도 그게 재미있어서 해야지 의무감에서 한다면 결국 자기희생이라는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 결과로 인생이 누추해지는 거예요.

사회운동도 결국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면 운동하는 사람 자신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할지라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하기에 따라 우리 각자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게 가능합니다. 이명박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그건 우리 자신을 등신 취급하는 얘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아이들의 경우라면, 첫째 대학 가는 걸 포기하면 돼요. 간단하잖아요. 온갖 무리를 하면서 부모나 아이들이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누구나 대학에 가야 된다는 강박적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제 말이 틀렸어요? 대학 안 가기로 한다면 당장에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 간단한 원리를 왜 모를까요? 대학 안 가기로 맘먹으면 아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스러워지겠어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배우자 만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 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막연한 생각에 매달려서 인생 전부를 희생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항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입시제도와 교육제도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지 어떻게 대학 안 가기가 해답이 될 수 있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 방향으로 계속 노력해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틀림없이 헛된 노력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이 고약한 입시와 교육제도는 부분적인 땜질은 끊임없이 가해지겠지만, 근본적인 골격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층의 이익이 이 제도의 존속과 너무나 긴밀히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는 한이 있어도 이 사회의 기득권층은 절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설령 나라 전체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요. 미국으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정말로 혁명적인 정치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혹시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가 계속되는 한, 그것은 국내외의 역학관계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그동안 망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인생은 무엇으로 벌충할 수 있을까요?

 

인생은 준비하는 게 아니다

제가 녹색평론 발간을 시작하고 난 뒤에 잡지에 실었던 글을 처음으로 엮어 《간디의 물레》라는 책을 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대개 그냥 상투적으로 생태학적 관심을 표명한 책이라고 이해하는 모양입디다만, 어떤 문학평론가가 그 책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이 책은 사람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고 있는 책이다”라고 썼더군요. 저는 그때 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과연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 마음을 읽은 것이지요. 사실 제가 녹색평론 펴내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거든요. 보통 생태운동가라면 지구를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금욕을 싫어합니다. 왜 금욕을 해요? 신이 우리를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냈을 때는 우리더러 금욕하라고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혓바닥에서 왜 그렇게 맛이 있어요? 금욕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당연히 맛이 없어야죠.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도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괜히 채식주의니 뭐니 그런 것 고집하지 말고. 사람들하고 같이 재미있게 둘러앉아 밥 나누어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인생사업이에요.

요컨대 준비하지 말자. 지금 당장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살자. 아이들도 그런 삶을 갖게 마련해주자. 그러면 우리의 의식도 굉장히 자유로워져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니까 남들에게도 많이 너그러워집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절대로 남들에게 너그러워지지 못합니다. 예전 한 10년 전에 저를 보다가 요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절 보고 얼굴 좋아졌다고 그래요. 사실 제 건강은 늘 좋지 않지만, 1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게 있다면 건강문제로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은 나이도 많이 들었으니까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인지 이 병을 빨리 고쳐서 건강하게 제대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안하게 돼요.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서 준비를 하지 않아요. 그냥 불면증으로 잠이 안 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책을 보고 있으면 결국 잠들게 돼요. 잠은 자정 전에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에 좋다 어떻다 하는 관념 자체가 없어지니까 잠이 안 와도 편해요. 저는 운동도 거의 안합니다. 그냥 내가 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주위에 있는 벗들과 재미있게 지내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게 오히려 건강에 좋은 거 같아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사춘기를 보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굉장히 아파요. 사춘기라는 게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깁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들도 다 그렇겠지만 나는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때가 사춘기였어요. 그리고 지금 나이 60이 넘도록까지 기본적으로 그 사춘기 시절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거, 그거 평생 써먹고 살아온 것 같아요. 그 후 살면서 디테일이 많이 붙었을 뿐이죠. 근본 바탕은 그때 다 정립됐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게 굉장히 싫었어요. 하여간 학교생활이 감옥 같고 그랬어요. 요즘 학교에 비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우리에게는 학원 같은 것도 없고, 과외도 특별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서울에서는 이미 학원이 번창하고 있었지만, 내가 살던 지방소도시는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 무렵은 대학 진학하는 학생들이 자기 또래 중에서 정말 얼마 안되는 숫자였어요. 대학 진학 안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물론 대학이 많지 않아서 입시경쟁이 심한 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별로 큰 압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더구나 내 경우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아예 대학에 가면 미당 서정주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당이 재직하고 있던 동국대학교 국문과의 그 당시 입시과목이 국어와 국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도로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어요. 내가 그 당시에 미당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친일문제 자체에 대한 의식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오직 미당을 시의 대가로 알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나중에 대학입시 직전에 진로를 바꾸는 바람에 내가 서정주 선생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고등학교 때 내가 입시의 중압 때문에 괴로워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이 지옥 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헤르만 헤세가 쓴 《수레바퀴 밑에서》 같은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거기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괴롭게 지내는 주인공과 같은 기분이 되어 지냈어요. 사실 우리학교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랬어요. 나도 수레바퀴 밑에서 짓눌려 지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사춘기라는 게 그렇게 예민한 시절이에요. 세계명작소설을 읽다보면 연애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주인공 남녀가 처음 만나서 사귀다가 키스하고 그럴 때 마치 내 자신이 당사자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못 이루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감정은 몇년 지나서 완전히 사라져버려요. 사춘기만의 특권적인 감수성인 거예요. 남들의 이야기를 그게 픽션이든 아니든 저렇게 풍부한 감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사춘기적 감수성이라는 것은 결국 신이 만든 겁니다. 그런 감수성은 아무리 돈을 써서 과외를 한다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절대 만들어질 수 없어요.

사춘기란 이렇게 소중한 거예요. 신이 준 선물이지요. 사춘기 시절의 풍부한 감수성 속에서 인간은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행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사춘기를 지금 우리사회와 교육이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하기는 아무리 교육이 엉망이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기는 해요.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일종의 기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면적으로 상처를 받고, 억압된 욕망으로 짓이겨져 있어요.

 

종말론적 상황 속의 정치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현실이 언제 어떻게 고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맨날 정부를 욕하고, 조중동을 욕해봤자 해결책이 안 나옵니다. 한국의 정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모든 사회적 모순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정상화라는 게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거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의 정상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해봐야 합니다. 오늘 낮에 어디서 보니까 최모라는 정치학자가 또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당체제의 미비에 있고, 정당체제의 미비는 정당이 노동운동과 연결이 안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군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늘 들어온 얘기지만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정당체제가 왜 완비되지 않으며, 노동운동과 연결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정당 내지 정치체제가 완비될 때까지 가령 이 아이들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아이들 다 망가지고 나면 뭐해요? 저는 그렇게 기다리는 거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당장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사는 게 중요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것은 엘리트들에 의한 지적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위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정상적인 정치라는 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기다려봤자 백년하청입니다. 수천년 동안 기다려봤잖아요. 안돼잖아요. 예수의 가르침이 뭐예요? 쓸데없이 기다리지 말고 지금 여기서 결판내자는 거 아니에요? 예수 시대나 지금이나 종말론적인 상황입니다. 아니, 지금은 문자 그대로 종말론적 상황이지요. 코펜하겐 기후변화 대책 회의를 보세요. 그 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인류의 생존 가능성 자체가 국제회의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사에서도 매우 특이한 사태임에 틀림없지요. 아무튼 우리가 지금 종말론적 상황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코펜하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녹색평론》에서 이 회의에 대해 별로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독자들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저는 《녹색평론》이 환경잡지라고 생각 안하기도 하지만, 코펜하겐 회의 같은 것을 통해서 이 종말론적 상황이 극복되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코펜하겐 정상회의 따위로는 애당초 될 일이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국가마다 자신의 국익을 우선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현재의 국제관계에서 국가들 사이의 자발적인 양보와 긴밀한 협력을 위한 틀이 무슨 수로 만들어질 수 있겠어요? 어제 신문 보니까 코펜하겐 회의에 임하는 한국정부의 대책은 ‘자발적 감축하되, 성장에 필요한 만큼은 배출’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런 염치없는 소리가 어디 있어요.(웃음) 소위 세계 전체에서 경제규모가 10위권 언저리에 있다는 국가가 개발도상국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거예요. 한겨레신문 보니까 경원대 김창섭 교수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모든 가구가 한해 21만7천원의 비용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가 없다.” 이 계산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결론은 “오직 남은 길은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게 서로 책임을 나눠 갖고 효율적으로 줄여나가느냐 하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묻고 싶어져요. 우리가 누군데? 사람들이 편리하게 ‘우리’라는 말을 잘 쓰는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밤낮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먹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배기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심각한 모순이잖아요. 그러면 이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이야기를 해야지, 정체도 불명한 우리라는 주체 아닌 주체의 공동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말이 안돼요. 더욱이 그런 사람들이 현명하게 서로 책임을 나눠 갖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날이 올 것 같아요? 단언컨대 절대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불가능한 얘기예요. 첫째는 우리가 누군지도 몰라요. 강남 부동산 투기꾼과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같은 ‘우리’에 포함될 수 있겠어요?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이에요.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현명하게 책임을 서로 나누면서 산다는 것, 절대로 안됩니다. 그게 된다면 사회주의 벌써 성공했게요. 그런 추상적인 희망에 기대를 걸다가는 죽도 밥도 안됩니다. 사실 그런 말 하는 사람 자신도 진심으로 그걸 기대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괜히 자기가 인류대표나 국가대표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강연을 하면 나중에 질문시간에 “그런 식으로 해서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세상사람 전부를 설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돼요. 우선 자기가 행복하고 자기 이웃과 벗들이 행복하면 되잖아요. 굳이 남들을 설득하겠다면 몸으로 설득하면 됩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면 돼요. 재미있게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딴 사람들이 “아 저거 재미있겠네” 하는 마음이 생겨서 따라하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잖아요. 왜 꼭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하는 걱정들을 해쌓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좋고 옳다고 생각하면 동지들과 합심해서 실천해나가면 될 텐데 말입니다.

 

국가의 논리와 녹색가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국가지도자적인 성향이 강해요.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도 언제나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살아요. 제가 학교 있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이 더러 있었어요.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왜 국가로부터 처벌을 각오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결행하는지 학생들이 알 필요가 있잖아요.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도 결국은 못 알아듣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러면 우리나라는 누가 지키는데요?”라고 질문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있어요. 자기가 국방부장관도 아니고 장관의 아들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소박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볼 줄 모르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국민으로서 사고하는 게 뿌리깊은 습성이 돼 있어요. 가수나 운동선수들도 맨날 텔레비전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하잖아요. 전부 국가대표예요. 그러니 늘 불만족스럽고 불행하지요. 왜? 국민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주지 않으니까. 편치 못해요. 가당찮게 다들 위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하고 자기 옆의 친구들하고 같이 재미있게 살 궁리나 하면 될 텐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국가라는 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11월 9일자 경향신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지난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한명숙 씨가 서울시내 모처에서 ‘즉문즉설’이라는 형식 밑에서 청중들과 자유롭게 주고받은 문답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사의 내용 중에 정말 중요한 게 있어서 이것을 오래 보존할 생각입니다. 한명숙 씨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청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조금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물론 노 전 대통령이 인간적인 분이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는 용서하기 어렵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당시에 우리나라 농민이 500만명이었는데 퇴임할 때는 3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한―미 FTA 등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에게는 재앙을 초래했다. 여기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시오.”

여기서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대통령 그만두고 봉화마을에 내려가서 오리농법하며 농촌 살리는 운동하겠다고 하기 전에 재임 중에 농민들을 살리기 위한 확실한 정책을 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노무현 정부 동안에 우리나라 농민 150만명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저도 몰랐는데, 사실이라면 이건 참 엄청난 실정이라고 해야 합니다. 150만의 농민들이 도시에 와서 일자리를 잡았겠습니까? 불가능한 얘기예요. 농촌이 그만큼 황폐해졌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농촌공동체가 결정적으로 깨졌다는 뜻입니다. 농촌공동체가 깨졌다는 것은 우리 삶의 토대 중의 토대가 붕괴되었다는 뜻입니다. 녹색평론이 지난 18년 동안 내내 해온 이야기가 그거예요.

저는 지금 노동운동이 벽에 부딪친 결정적인 이유도 우리 농촌의 붕괴현상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농업과 공업이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공업은 어떤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지 말아야 하고요.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소위 눈부신 경제발전을 했다는 한국의 경우는 일방적인 공업화 편중정책을 끝도 없이 편 나머지 완전히 기형적인, 그리고 매우 위험한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공업마저도 대기업, 수출 위주의 공업화가 막무가내로 추진되는 바람에 이제는 대외여건에 취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가 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갈수록 노동운동이 약화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동안 노동운동이 농촌을 등한시해온 것과 관계가 크다고 저는 봅니다. 노동운동이 농촌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던 겁니다. 농촌이 부서지고 망가졌기 때문에 한때는 모두 농민의 아들과 딸들이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돌아갈 데가 없고,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 이걸 잘 알고 있는 자본가들과 국가권력이 노동자들을 계속 몰아붙이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요새 늦게나마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과 연대하려는 노동운동 조직이 생겨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농산물만 해도 얼마나 많아요. 생협을 만들어서 농촌과 제휴하여 곡식과 야채 등을 공급받는다면 농민도 살고 노동자들의 건강도 좋아질 거란 말입니다. 그 간단한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니까 그동안 방치하고 있었던 거예요. 최근에 민노총 부산지부에서 생협을 만들어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는데 늦게나마 바람직한 방향을 잡았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농촌과 연대해서 아이들도 농촌에 가서 메뚜기도 잡아보는 경험을 하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바로 이겁니다. 막강한 자본과 국가권력을 상대로 우리가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권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설 수는 없는 거죠. 우리는 사상으로서밖에 맞설 수가 없어요. 사상이라는 무기말고는 없어요. 그리고 사상이라는 무기를 쓸모있게 하자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명숙 씨가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볼까요. 아까 그 농촌정책의 부재를 비판하는 청중의 질문에 대한 한명숙 씨의 답변입니다. “죄송합니다. 역부족이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국정을 운영해보면 한국의 경제적 지위를 수치상으로 상승시키지 않으면 권력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상황이 옵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예요. (하략)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 글은 2009년 12월 8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시민학교 열린 특강'의 하나로 서울 마포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행한 강연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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