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8호 2009년 9-10월호  

  삶을 위한 경제 ― 왜 기본소득 보장과 신용의 사회화가 필요한가

  세키 히로노

붕괴하는 경제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불황이 아니라 공황이라는 사실입니다. 불황과 공황이 어떻게 다른지는 경제학자들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불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딸꾹질 같은 것으로 기업의 재고정리로써 정돈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공황은 자본주의의 원리적 모순이나 결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 모순이나 결함에 대한 근원적인 대응 없이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결함을 시정하는 방책은 내 생각으로는 다만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무조건 일정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용을 사회화하는 것입니다.

  이 신용의 사회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세계 각국 정부는 어디에서도 지금의 사태를 불황이하고 말하지 공황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현실회피라는 면도 있지만, 정책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불황이라고 말하는 동안에는 익숙한 불황대책을 강구하면 됩니다. 공공사업이나 금리인하 같은 것으로. 그런데 사태를 공황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황이다, 불황이다 하고 자꾸 말하고, 그 결과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고, 또 어떤 정부가 들어서고 있지만, 실행하는 정책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확실히 세계경제는 밑바닥으로 가고 있습니다. 공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면적 붕괴라고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태가 공황이라는 증거는 일찍이 1930년대에 공황에 대한 훌륭한 분석을 행했던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이름이 부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 바로는 케인즈의 제일 시시한 측면, 즉 경기 자극책으로 적자 공공사업을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만이 평가되고 있을 뿐이지, 케인즈의 급진적이고 흥미로운 면은 아직 잊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과 부자혁명

1930년대 대공황이 한창이던 때 케인즈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드물게 일반인 상대의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강연입니다. 그 강연에서 그는 우선 인간의 욕구(needs)를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절대적 욕구, 즉 의식주 등 기본적 욕구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적 욕구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사이에 차등을 두고 싶은 욕구입니다. 당신은 ‘카로라’지만 나는 ‘벤츠’다, 라는 식으로 타인에 비해 돋보이고자 하는 과시욕구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아직 산업혁명이 완료되지 않았다고 케인즈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은 잠시 탐욕이라는 게 그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손자 세대에는 인간은 경제라는 것에 관심이 없어질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은 더이상 문제가 안될 것이며, 그 대신 아마도 예술이나 학문 등 문화적인 활동에 분주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인즈가 죽은 뒤, 1960년대에 선진국에서는 젊은이들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저 젊은이들은 바로 케인즈의 손자 세대에 속합니다. 그 60년대의 반항적 젊은이들은 게바라나 모택동을 인용했지만,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오히려 케인즈의 논리로 설명이 됩니다. 즉, 당시 젊은이들의 메시지는, 이제 풍요는 그만! 이 관리사회, 이 억압, 이 차별, 이 경쟁을 대가로 한 피상적인 풍요는 이제 충분하다! 인간다운 감성이 풍부한 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이 60년대 젊은이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점에서는 케인즈의 예측은 적중한 셈입니다.

  그리고 60년대의 반란 후 70년대, 이 시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거대한 전환의 시대였습니다.

  케인즈는 자신의 손자 세대에는 자본주의는 노쇠하여 안락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자본주의의 안락사를 예감케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즉 시장의 포화(飽和), 기술혁신의 정체, 자원과 환경의 위기라는 형태로 자본주의적 성장의 한계가 확실히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리치나 슈마허 같은 사상가들의 책이 열심히 읽혀졌습니다. 게다가 7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선진국 기업의 수익이 저하하기 시작하여, 지금도 이 수익저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전과 같은 활력을 기업이 다시 되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공황까지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대로 안락사하기는커녕, 레이건과 대처를 통해 자본주의의 정체와 혼미에 대한 부유층의 필사적인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반격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라든가 시장원리주의라든가, 여러 용어가 사용되어왔지만, 제일 이해하기 쉬운 말은 ‘부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사치와 안락에의 요구를 돌파구로, 자극제로 삼아서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것입니다. 서민들에게는 이른바 적하(滴下) 효과에 의해 부유층이 먹다 남은 국물이 흘러내릴 것이라면서, 부유층이나 대기업에 대한 우대(優待)를 정당화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자혁명’은 보기 좋게 좌절되었습니다. 케인즈 자신은 훌륭한 옛 영국신사였기 때문에 타인들보다 돋보이고 싶다는 욕구만으로 움직이는 경제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 경제는 바로 케인즈가 말하는 상대적 욕구, 즉 타인과의 사이에 차별성을 갖고 싶다는 욕구로 움직이는 경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역시 경제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이건 시대에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빈부차가 확대되고, 나아가서 글로벌화에 의해 미국 국내 산업은 공동화(空洞化)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클린턴이든 부시든 레이건의 노선을 바꾼 것도 아닙니다. 레이건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이런저런 거품경제를 일으켜 어떻게든 레이건 노선을 부활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런저런 거품경제 끝에 결국 이번의 주택 버블로 넘어진 것입니다.

 

현대는 과잉자본의 시대

그렇게 보면 역시 1970년대에 자본주의는 안락사를 맞이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한 방법으로 필사적으로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이 공황이라는 형태로 빈사상태에 빠진 게 아닌가. 그런데 케인즈는 어째서 자본주의가 안락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요컨대 자본이 귀중한 경제 시스템입니다. 자본이 흔해 빠졌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자본이 귀중하다는 것은 그것이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얘기입니다. 점점 확대되는 시장이 있고, 참신한 기술혁신이 있어서 일확천금의 투자 기회가 있는데도 자본이 없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자본의 희소성(scarcity)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주의를 성립시킵니다. 산업혁명기에는 자본가는 무턱대고 돈을 벌었습니다. 벌 수 있는 이상, 누구라도 자본이 욕심나기 때문에 자본의 희소성, 부족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케인즈의 손자들 시대가 되면 경제는 완전투자 상태가 됩니다. 투자해야 할 것은 전부 투자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욕망은 거의 충족되어, 자본은 가치가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자본은 공기나 물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상황을 그는 상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공황은 자본의 과잉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필요는 거의 충족된 상황에서 쓸 데가 없어진 자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의 경제는 과잉자본의 처리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맑스가 묘사한 산업혁명 시대에는 자본이 부족했고, 그 때문에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 반대로 자본의 과잉이 공황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자본의 부족이 야비한 자본가를 낳았던 시대의 문학작품, 즉 <해공선(蟹工船)> 같은 소설은 지금 읽어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대사회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것은 완전투자라는 현상입니다. 대규모 신규투자 기회가 소멸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완전투자와 과잉자본 시대를 분석한 점에서는 케인즈는 옳았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케인즈에 이의가 있습니다. 지금 잠시는 산업혁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논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본래 금융론이나 경제가 아니라 역사학이 내 분야인데, 그 쪽에서 보면 의문이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빈곤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빈곤, 사람들이 의식주에서도 결핍을 느끼고,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는 궁핍상태를 해소한다고 하는 산업혁명의 사명은 20세기 초엽까지 달성된 게 아닌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는 것은 거의 대체로 20세기 초 정도까지는 충족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이후 자본주의는 무엇을 해왔는가. 산업혁명의 사명이 완수된 이후는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만들고, 사치품을 만들고, 무기 따위를 만들어왔습니다. 이것이 20세기가 전쟁과 환경파괴의 세기가 된 근본적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케인즈의 견해는 틀렸고, 이미 20세기 초에 산업혁명이 거의 완료되고, 자본과잉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클리포드 더글러스라는 인물

그리고 오늘의 문제는 자본이 과잉상태가 되었는데도 자본이 부족했던 시대의 제도가 공룡처럼 살아남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근본문제이며, 그 가장 전형적인 예가 은행입니다. 자본이 더이상 부족하지 않은 시대에 짐짓 자본을 귀중한 것, 부족한 것이라고 연출하고 있는 게 은행입니다. 그러한 은행 권력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한 사람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엔지니어였던 클리포드 더글러스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은 사회신용론(social credit)으로 호명되고 있습니다. 그 사회신용론의 일환으로 그는 ‘기본소득(basic income)’을 제창하고, 오늘날의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에서는 보기 어려운 철저한 이론적ㆍ경제적 근거를 가지고 논리화했습니다. 그는 1890년경에 태어나 1952년에 사망했습니다. 세대적으로는 미국의 제도학파 경제학자 베블렌과 거의 동시대인으로, 베블렌은 그에게 크게 공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공유했습니다. 단지 베블렌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평을 했다면, 더글러스는 금융자본을 해체하기 위한 사상과 운동을 창조해냈습니다.

  이 더글러스가 ‘기본소득’을 역사상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입니다. 근년에는 독일의 베르너 등의 책이 번역되어 일본에서도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혀져온 더글러스야말로 최초로 이것을 제창하였고, 그것도 단순한 인도적 발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리적 분석에 기초한 제창이었습니다.

  우선 소개를 한다면,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이 몹시 싫어져서 중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수한 엔지니어가 되어 인도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社) 등에서 일하고, 영국에서는 지하철 자동화 장치 등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이 사람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공군 소령으로 항공기 생산공장의 회계감사 일을 했습니다. 그때 기업의 회계에 이런저런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그가 발견한 것은, 노동자는 기업에서 임금 급여를 받더라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기업이 생산한 것을 총체적으로 구매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노동자가 생산한 제품들의 총가격은 노동자의 소득총액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어서, 100개 이상의 공장의 회계를 조사했지만,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소득 총액으로는 결코 상품의 총체를 매입할 수는 없다. 가격과 소득 사이, 생산과 소비 사이에 터무니없는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간극이 발생하는가를 연구한 결과, 그는 사회신용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학회 등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경제학자들은 기인(奇人) 취급을 하며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사회주의 잡지가 그의 에세이를 게재해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였고, 더글러스가 말한 것이 전부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더글러스는 ‘경제사상의 아인슈타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캐나다나 영국의 의회에서 증언을 한다든지 보고서를 제출한다든지, 뉴질랜드의 재정개혁안을 작성한다든지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일본에도 국제회의 참석차 왔습니다. 전쟁 전에는 그의 저서도 일본어로 번역이 나왔습니다. 영국 이외에서도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에서 그의 지지자는 많았고, 그로 인해 그의 사회신용론은 사회신용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그의 사회신용론은 문학가들에게도 환영을 받아 T. S. 엘리어트나 에즈라 파운드 등이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플린이 더글러스의 책을 읽고는 서둘러 주식과 채권을 전부 처분했고, 덕분에 대공황으로 인한 피해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케인즈의 급진적이고 흥미로운 점은 거의 이 더글러스의 표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다만 엘리트 경제학자이면서도 당당히 더글러스를 표절하고, 더글러스를 기인 취급하지는 않고 올바르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케인즈는 위인이었습니다. 케인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문명의 미래는 더글러스냐 맑스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맑스는 싫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공황 시대에 이만큼 주목을 받은 더글러스는 세계대전 후에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황이 유야무야하게 전쟁에 의해 끝났기 때문에 더글러스는 순식간에 잊혀진 것입니다. 나 자신도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말미에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더글러스를 처음 알았습니다.

 

과잉자본을 시야에 둔 더글러스의 사회신용론

소득보장론은 더글러스의 신용사회화론 내지는 사회신용론의 일환으로 나온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기본적이며 강렬한 의식주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자본은 과잉상태가 됩니다. 이 자본과잉 상태의 원인은 시장의 포화이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19세기 말 이래 진행되어온 산업의 자동화입니다. 자동화는 기본적으로는 좋은 것입니다. 더글러스도 “자동화 제품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지만 칫솔이나 연필 같은 것을 손으로 만들어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동화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자동화하는 게 좋습니다. 자동화가 진행됨으로써 인간은 시시하고 단조로운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자동화가 그에 따른 혜택을 서민들에게 조금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기계화로 인한 실업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리하여 풍요 가운데 빈곤이라는 현실이 태어난 것입니다.

  더글러스가 이런 논의를 했던 20세기의 초엽에도 자동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러 연구에 의하면 현대는 자동화 기술을 완전히 활용한다면 전체 노동인구의 4분의 1 정도에서 모든 생산이 가능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현대인은 잠재적으로 실업자인 셈이지요. 이 사실을 간과하면 “고용을 유지하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글러스는 현대에 있어서는 자동화와 시장의 포화, 기본적 욕구 충족에 의해 생산의 문제는 전부 해결되었고, 현재의 문제는 분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함없이 생산의 시대를 연출하고, 분배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자본과잉의 시대에 고의적으로 자본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금융자본입니다. 그 금융자본이 기업에게는 자본이 부족하고, 노동자에게는 소득이 부족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현상을 더글러스는 철저히 문제 삼고 있습니다. 풍요 가운데 빈곤이라는 사태가 어째서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는 금융기관, 은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은행이라는 것을 철저히 문제 삼았다는 게 그가 잊혀지고 묵살되어온 한 가지 요인입니다. 경제학자는 더글러스의 이름을 알고 있어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란 간접적으로 은행에 고용되어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계 경제학자는 다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은행과 은행을 가능하게 하는 돈의 존재방식, 그것을 변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더글러스의 경우, 맑스와는 전혀 달리 그는 개인의 자유를 사상의 근본에 두고, 시장도 기업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볼 때, 부가 효율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시스템을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금융자본, 자본과잉의 시대에 자본 부족을 연출하고 있는 은행이라는 것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은행은 <주라기 공원>에 나오는 공룡 같은 존재입니다. 즉, 자본이 부족했던 산업혁명 초기라든가, 그 이전 영국이 식민제국이 되어 잉글랜드은행이 출현했던 17세기의 유산을 시대착오적으로 등에 업고 있는 공룡입니다.

 

은행제도의 역사

은행제도의 역사라고 하면, 1694년에 영국에서 잉글랜드은행이 창설되었고, 그 후 세계의 은행들은 대부분 이 잉글랜드은행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잉글랜드은행 창설의 계기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입니다. 이 당시부터 국가간의 전쟁 비용은 거액이어서 국왕의 세금 징수능력만으로는 조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왕은 런던의 대금(貸金)업자로부터 돈을 빌렸습니다. 대금업자들은 원래 금세공사(金細工師)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이 금을 맡겼고, 그들은 그 보관증을 지폐로 유통시켜 금융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왕은 그들에게서 돈을 빌리고, 그 대신에 그 민간금융업자들에게 공인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국왕과 대금업자 사이에 일종의 유착관계가 성립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행은 국가가 대금업자에게서 돈을 빌리는 형태로 시작된 것입니다. 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하는 특권을 왕으로부터 부여받아, 이름을 잉글랜드은행으로 붙였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국가의 지폐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은행의, 은행에 의한, 은행을 위한 돈입니다. 오늘의 일본은행에도,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에도, 어디에도, 은행에는 그러한 속임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주화(鑄貨)를 보십시오.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화라는 것은 위정자가 발행하는 게 정상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랬고, 세계 어디에서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영국에서는 국가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그 보답으로 은행에 통화 발행의 특권을 준다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당시 영국의 역사적 사정에 기인합니다. 종교전쟁 후 영국왕은 세금을 거둘 능력을 잃었습니다. 근대전(近代戰)을 위한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세금 조달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런던의 금융업자들은 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부유해져서 사실상 잉글랜드 왕국의 음성적인 지배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사리사욕으로 움직이는 은행이 마치 공적기관과 같은 얼굴을 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전세계 은행의 모델이 돼버렸습니다. 게다가 17세기 이후 영국경제는 거액의 장기적 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는 카리브해 지역에 식민지 대농장을 조성, 흑인노예를 사용하여 사탕이나 담배를 재배해서 그것을 유럽으로 가져와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사업에는 장기적인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은행 수준이 아니면 그 자본은 조달이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산업혁명기가 되면 기업은 점점 제조과정을 기계화하기 위한 설비투자를 합니다. 여기에는 큰 돈이 들기 때문에 은행에서 융자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용창조, 환(幻)의 돈이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은행이 대체 무엇을 하는지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선 은행의 특징은 부분준비제도(fractional banking)에 있습니다. 즉, 은행은 사람들이 맡긴 예금의 몇배나 되는 돈을 대출합니다. 대개 8배 내지 10배가 보통입니다. 오늘의 금융위기의 초점이 되어 있는 파생상품이라면 50배 내지 80배 정도까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불량채권이 되면 거대은행이라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은행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용의 창조, 즉 무(無)에서 돈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씨가 100만엔을 예금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B씨가 은행에서 기업 운전자금으로 100만엔 빌립니다. 그러나 은행의 장부를 보면 B씨에게 100만엔을 대출했다고 적어놓지만, A씨의 예금을 장부에서 삭제한다든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전과 다름없이 장부상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B씨에게 100만엔 대출한 것이 은행의 자산으로 장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무(無)에서 새로운 돈을 창출해내는 것입니다.

  즉, B씨에게 빌려준 돈은 은행이 장부상에서 만들어낸 돈인 것입니다. A씨의 예금과는 실은 관계없는 셈입니다. 게다가 B씨에게 빌려준 돈은 B씨에게는 무거운 부채일지라도 은행으로서는 기한내에 이자가 붙여져 되돌아올 자산이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은행은 신용을 창조합니다. 무(無)에서 신용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은행은 있지도 않는 것을 팔아서 큰 돈을 버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공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것은 사기(詐欺)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미국의 텍사스주는 20세기 초까지 은행업을 부도덕한 비즈니스로 간주하여 금지했습니다. 부동산 소개업자는 집을 사려는 사람과 팔고자 하는 사람을 중개해서 그 수수료로 먹고 삽니다. 부동산 소개업자가 있지도 않는 물건을 판다면 곧바로 사기범으로 체포될 것입니다. 그런데 은행은 있지도 않는 돈을 팔고, 거기다가 그 영향력으로 그림자정부 행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괴한 일이 또 있을까요.

  부분준비제도라는 것은 은행 돈이 처음부터 환(幻)의 돈, 불량채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경제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사기가 가능할까요.

 

은행신용의 공죄(功罪)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협력해서, 결사체를 만들어 뭔가를 시작하면 개개인으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부(富)가 생겨납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기껏해야 작은 목공품밖에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1,000명이 함께 일하면 자동차도, 비행기도, 그 무엇이라도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협력과 결합에서 생겨난 부가 있습니다. 은행은 말하자면 그러한 부를 슬쩍 훔칩니다. 사람들의 협력과 결합에서 새로운 부가 생겨나는 과정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것입니다. 기생적(寄生的)으로 횡령합니다.

  그래서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문제가 아니라, 사적 횡령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은행은 부채의 그물로 사회를 뒤덮습니다. 이 은행신용이야말로 사회를 조직하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은행이야말로 은폐된 정부입니다. 우리가 상점 계산대에서 지불하고 사용하는 지폐나 경화(硬貨)는 실제로는 경제를 움직이는 돈의 겨우 몇 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실제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돈은 거의 은행신용입니다. 돈의 90퍼센트 이상은 은행 돈입니다. 현대경제는 은행에서 빌린 돈, 부채로 움직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부채를 갚아야 하는 의무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은행 부채를 100퍼센트 갚아버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경제는 순식간에 전면적으로 정지해버릴 것입니다. 현대경제는 그러한 경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빌린 돈을 달갑게 여기지 않지만, 은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행에게는 타인의 부채가 자신의 자산입니다. 그러니까 일본국가에 800조의 부채가 있다는 것은 은행으로서는 큰 자산이어서, 이 부채가 청산되면 은행은 곤란해집니다. 영원히 나라가 빚더미에 허덕이게 하고, 거기서 이자를 챙기는 게 좋습니다. 천엔권이나 만엔권 등 일본은행권이라는 게 있지만, 일본은행의 장부에서 보면 이것은 부채입니다. 일본은행권이 장부상에서 부채라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은행에게 지폐, 통화의 본질이 부채라는 것을 일본은행권은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은행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일본은행이 가지고 있는 일본국 국채입니다. 그 외에도 일본은행은 금이라든가 여러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국채가 최대의 재산입니다. 국채란 요컨대 납세자를 볼모로 삼은 차금(借金)증서입니다. 납세자를 볼모로 삼은 국가의 차금(借金), 그것이 일본은행권의 가치를 보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이자가 붙습니다. 이자를 붙여서 갚지 않으면 안되는 부채. 더욱이 경우에 따라서는 복리(複利)로써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한 이자가 붙는 부채입니다.

 

이자(利子)의 성질은 현실에 맞지 않다

이자라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이자라는 것은 일단 정해지면 변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이윤추구 때문에 흔히 비판받지만, 이윤은 시장의 동향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합니다. 그런데 이자에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 닮은 것, 물리법칙에 닮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한신(阪神) 대지진으로 우리집이 무너졌으니 이자를 좀 깎아주십시오, 주택융자 이자를 좀 깎아주십시오”라고 말해도 은행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증대될 뿐, 절대로 감소될 수는 없는 게 이자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끝없는 경제성장의 근본 요인입니다. 이자를 폐지하지 않는 한, 환경 친화적인  경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특징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은행이 국채를 사게 합니다. 그것이 세금 이외의 국가의 재원이 됩니다.

  만약에 국가에 세금밖에 재원이 없다면 국가는 세수(稅收)의 틀 내에서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국채를 팔아서 돈이 들어오면 국가는 그것으로 마음먹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채는 차입금이지만 그러한 것은 납세자들에게 청구서를 돌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국채 발행이 근대국가의 운영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자가 붙는 부채인 은행신용이 경제 속에서 갈수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 그만큼 돈이 부족하게 됩니다. 즉,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유통자금이 감소하게 됩니다. 이자가 붙은 부채라는 마이너스 화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의 양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돈의 양이 제한됨으로써 기업에게도, 서민에게도, 자본은 늘 귀중한 것, 부족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은행이라는 장사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은행의 덫에 붙들리지 않고 돈이 윤택하게 공급될 수 있을까요.

 

공공통화(公共通貨)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이자가 붙는 부채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자가 붙는 부채로 움직이는 경제를 해소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끊임없이 새로운 부를 낳는, 사람들의 결합과 협력을 상징하는, 그러한 통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경우, 그것은 인민의 결합과 협력에서 생겨나는 통화이기 때문에 공공의 통화로서,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됩니다. 은행권이 아니라 일본국 지폐입니다. 그리고 그 공공통화에 의한 융자에는 이자는 붙지 않습니다. 붙는다 하더라도 사무적인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극히 근소한 이자일 뿐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통화라도 빌리면 국가에 원금을 갚아야 하는 것이지만, 은행과 같이 타인의 부채를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발행되는 통화는 아닙니다.

  그러한 사회의 합의와 협력의 징표인 통화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더글러스의 사회신용론의 첫번째 결론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이처럼 국가가 직접 통화를 발행하는 것은 고대에서는 보통이었고, 근대에도 그 예는 흔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독립혁명 이전에 펜실베이니아주가 그러한 통화를 발행하여, 그 덕으로 주(州) 경제는 크게 번영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식민지 미국이 번영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하여, 그것은 이 통화제도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본국 영국에서는 모두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허덕이고 있지만 미국의 인민은 차입금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그 때문에 곤란해진 잉글랜드은행이 영국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식민지를 중세(重稅)로써 압박하려고 하는 등, 이 통화제도를 둘러싼 싸움이 미국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북부에는 막대한 전비(戰費) 조달이 필요해졌는데, 링컨이 그것을 유럽의 은행들에서 조달하려고 알아보니까 30 내지 40 퍼센트의 이자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그린백’이라는 정부통화를 발행했습니다. 이 영단(英斷) 덕분에 북부는 남북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링컨의 암살에는 이 통화개혁이 관계되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존 F. 케네디가 연방준비은행이 마음대로 민간자본으로 통화를 발행하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정부통화를 발행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가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통화개혁과 관계되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찰(太政官札), 이것은 정부화폐지요. 또 전쟁 전에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내각이 대공황 시대에 국채를 일본은행이 인수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은행과 일본은행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부화폐의 발행과 사실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 정책으로 일본은 각국 중에서 가장 일찍 공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예를 보면, 태정관찰은 인플레의 폭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다카하시의 정책은, 더글러스도 “내가 말하는 정부 발행 화폐와 상당히 닮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모처럼 그 덕분에 공황으로부터 회복된 경제력은 중일전쟁에 쏟아 붓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스스로 통화를 발행하는 것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무엇이 공공의 이익인가에 대한 확실한 인민의 합의가 있고, 그 합의를 반영하는 정부가 있으며, 그것을 정확히 실행하는 재무당국이 있는 것, 이것이 정부통화 발행에 있어서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최근 자민당 일부에서 정부지폐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민당은 이권(利權)을 나누어 먹는 공공사업을 해왔지만, 지금은 국가재정의 엄청난 적자 때문에 거기에 뭔가 제동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지폐 이야기를 꺼내, 이것은 좋은 아이디어다, 이로써 또 나누어먹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글러스의 A+B 이론

그런데 은행과 기업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산업혁명 이래 생산의 기계화, 자동화가 진행되어, 종래 가내공업이었던 기업은 이제 은행에서 융자를 얻게 되고, 이리하여 금융업계가 실체경제에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더글러스는 문제 삼습니다.

  이 환경에서는 설령 대기업일지라도 은행 없이는 기업운영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기업이라도 은행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의 까다로운 대출이 문제가 되어 있지만, 은행이 대기업에 우선적인 융자를 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자금이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대기업이라도 은행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도요타의 무차금(無借金) 경영이라든가 하는 것은 거짓 풍문입니다. 대기업일수록 상당한 내부유보가 있다 하더라도 설비투자나 연구개발이나 시장개척을 위해 은행 융자가 필요합니다.

   더글러스는 제1차 대전 중에 기업회계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경제의 실상을 발견했습니다. 생산비용은 늘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나 급료를 훨씬 웃돌고, 한 나라의 상품의 총가격은 근로자의 총소득을 능가하기 때문에 근로자는 소득=구매력 부족에 시달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더글러스는 A+B 정리(定理)로 정식화했습니다. 이 A+B 정리로써 그는 기본적으로는 단순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기업의 생산비용을 A와 B로 나누어, A는 노동자의 임금이라든가 급료라든가 하는 것으로, 이것은 사람들의 소득이 되고 구매력이 됩니다. 덧붙여 말하면, 이 ‘구매력(purchasing power)’이라는 것도 더글러스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B라는 것은 감가상각비라든가 은행 부채의 반제(返濟), 타기업에의 지불금 등입니다. 그 밖에 여러가지 외부비용, 거래처에 대한 접대비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듯이, A보다 A+B가 큽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결코 기업이 생산한 생산물 전부를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품의 가격은 이 생산비용 A+B에 더하여 이윤을 고려하여 결정됩니다. 그런데 더글러스는 이윤은 크게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이윤은 기껏해야 기업회계의 3% 내지 5% 정도로, 그것이 근로자를 괴롭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기업에 대한 금융의 개입, 이것이 문제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A보다는 A+B 쪽이 큰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인건비나 노무비 등이 기업의 총경비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이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스미스나 리카도의 고전경제학이 아직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시절이어서, 생산은 반드시 소득이 되어 노동자는 그것으로 상품을 자유롭게 사서 소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고전경제학은 독립자영농민 등을 경제의 모델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중의 기계제 대공업에는 전혀 맞지 않는 논의인데도, 그것이 버젓이 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더글러스는 그것이 시대착오적 논의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더글러스가 정말 문제 삼은 것은 A보다 A+B 쪽이 크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돈의 흐름입니다. 시간과 함께 생산비용 중에서 A에 대해서 B의 비중이 점점 증가한다, 거꾸로 말하면, A의 비중이 점점 감소한다는 구조를 밝혀낸 것입니다.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은 은행 돈

기업의 제품이라는 것은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최종 제품이 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철강이나 유리나 플라스틱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간단계의 제품을 만드는 기업은 소비자와 관계없이 생산하는 셈입니다. 다만 그런 기업의 생산비용도 최종적으로는 소비자가 사는 상품의 가격에 전부 전가되어, 거기에 집적됩니다. 그러한 몇 단계를 거쳐서 최종 제품이 되는 고도의 공업제품은 그만큼 B의 부분을 점점 증가시키고 A의 부분을 감소시킵니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급료를 지불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봅시다. 5월분 급료를 받는다고 합시다. 그 5월분 급료로 노동자는 실은 몇달 전에 출하, 판매된 기존 상품을 구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업은 현재 진행중인 노동자의 작업에 급료를 지불한 것입니다. 이 진행중에 있는 작업은 기업으로서는 투자활동인 셈입니다. 그 투자활동의 일환으로 고용이 성립하고, 노동자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기업의 투자활동의 상당 부분이 은행에서 빌린 융자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로자들에게 지불되는 임금도 실제로는 상당 부분이 은행 돈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열심히 일한 자신의 노동성과로서 급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은행대부금으로 살아가는 생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상품을 사면, 그것을 생산한 기업의 수익의 상당 부분은 은행 부채를 갚는 데에 쓰입니다. 결국 노동자는 빚으로 생활하고 있고,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은행에 빚을 갚는 그런 구조인 것입니다. 은행만이 살이 찌고, 근로자의 경우는 형편이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은행 융자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기업활동의 숙명입니다.

  물론 기업의 수익은 모두 은행 부채를 갚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 기업의 내부유보에 충당되는 몫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업은 재투자에 쓸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노동자의 소득이나 구매력의 증진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형태로 노동자는 일하면 할수록, 상품을 사면 살수록 자신을 곤경에 빠트립니다. 그런데 기업에 있어서 시장은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소비자로서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자의 소득이 줄어든다면 기업 자신도 판매부진으로 고생한다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비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 간극을 거듭 은행 차입금으로 메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 자체도 개미지옥 같은 것이 되어, 금융화 경제의 모순을 은행신용으로 계속 메워나가는 꼴이 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무역입니다. 상품을 수출하는 것이지요. 수출로 흑자가 되면, 외국의 시장에서 끌어모은 돈은 은행자본과는 관계없고, 이자도 부채도 아닌 현찰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이야기가 없지요. 그래서 어떤 나라의 기업이건 무역전쟁에 이겨 수출로 돈을 벌려고 필사적입니다. 생각해보면, 수출! 수출! 무역! 무역! 하는 시끄러운 소리들은 얼마나 기업 자체의 내부모순, 노동자의 소득은 감소하는 한편에 설비투자 등 부채는 증가하고 있는 모순이 확대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A+B 정리에서 보면, 어쨌든 노동자의 구매력은 놀랄 정도로 한정돼 있습니다. 더글러스는 생산 제경비(諸經費)가 가격의 형태를 취하고, 거기에 이런저런 요소들이 소비자들에게 전가되면, 실제 노동자의 구매력은 실질적인 기업회계의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정된 구매력을 쟁탈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기업들은 격렬한 경쟁을 하게 됩니다. 구매력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경쟁의 주요 원인입니다. 자본ㆍ구매력ㆍ돈의 부족 때문에 기업간에 격렬한 경쟁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노동자가 받는 임금 이외에 상품이 팔리는 별도의 경로는 없기 때문에 노동자가 그 임금, 급료로써 기업이 몇달 전에 만든 상품을 살 수 없게 된다면 기업은 파탄합니다.

 

끊임없는 생산의 확대, 근대기업의 숙명

생산이 확대되고 있으면 그에 따라 근로자들에게 돌아오는 몫이 어느 정도 증가합니다. 기업이 확대된다면 그만큼 A의 부분이 명목상은 다소 절대적으로 증가하는 형태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기업은 끊임없이 생산을 확대하도록 강제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경제성장은 근대기업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B 정리의 모순이 있으면서도 기업이 바로 무너지지 않고 연명을 하고, 공황이 바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끊임없는 경제성장으로 명목임금은 다소 오르고, 게다가 노동자는 몇달 전에 생산된 물건을 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순을 다소는 완화합니다. 그러나 그뿐, 경제성장이 정지하면 바로 심각한 불황이나 공황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생산의 확대라지만, 소비자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거의 전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기업은 어떻게 하는가. 궁여지책으로 잡동사니를 만들고, 사치품을 만듭니다. 모두 낭비밖에 안되는 것, 위험한 것을 만듭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업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그러나 기업에는 은행의 피해자인 측면도 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렸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업 자신도 이자가 붙는 부채 때문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근본문제는, 돈이 생산이나 소비의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은행의 금융적 이익이 되느냐 않느냐 라는 척도에서 융자되고 있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은행도 융자대상에 대한 심사는 하지만, 결국 은행의 손익계산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은행은 돈을 발행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수요를 확실히 지켜본 다음에 그것에 어울리는 형태로 돈을 발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고, 은행의 논리, 이자 붙는 부채의 논리로 돈을 발행하고, 기업에 대출합니다. 그 결과로 기업에 있어서는 부채의 누적적 증대가 발생하고, 노동자에게는 소득의 계속적 감소가 있습니다. 이것을 은폐하고, 지연시키는 수법들이 있어서 간단히는 파국에 이르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구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채경제, 이자가 붙어 있는 부채를 갚아야 하는 의무에 기초한 경제와 인연을 끊고, 별도의 돈 흐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투자로 고용이 창출되고, 그 고용에 의해서만 소득이 생겨나며, 그 소득만으로 상품이 구매, 소비되는 경로가 만들어지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에 의한 소득은 고용으로 생겨나고, 고용은 기업의 투자로부터 생겨나며, 투자의 배경에는 은행의 융자가 있습니다. 이 연쇄를 끊지 않으면 사람들은 소득부족, 기업은 판매부진에 허덕이는 상황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용과 소득을 일정한 정도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용과 소득을 분리해서, 사람들의 구매력을 보장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채경제를 해체하는 것, 그 일환으로 고용과 소득을 분리해서 원활한 돈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사회신용론의 과제입니다.

 

적정가격의 형성

여기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일단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더글러스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노동자 착취’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요체인 ‘가격형성’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우선, 생산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소비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경제는 생산과 소비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과잉생산이라든가 과소소비가 없는 상태가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가격은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도록 책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글러스가 실제의 상품 가격을 조사해 본바, 그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생산설비의 감가상각비나 은행에의 반제(返濟) 혹은 장래에 대비한 연구개발비 등으로, 노동자의 임금급여는 근소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기계제 대공업 시대에는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저절로 정해진다는 고전경제학의 논리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격의 왜곡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은 시장 가운데에서 자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근본원인은 은행이 자신의 금융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실체경제에 개입해서 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좌우하고 있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채경제를 해소하는 방책은 국가에 의한 통화의 발행, 공공통화를 발행하여 기업이나 그밖의 경제주체에게 이자 없이 융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고용과 소득을 일정한 정도 분리하지 않으면 근대 기업경제는 그 딜레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분리를 실행하기 위한 방책이 ‘기본소득’입니다. 

 

‘국민배당’과 문화적 유산

그런데 더글러스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국민배당(national dividend)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배당인가 하면, 우선, 사회의 결합과 협력에서 새로운 부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노동의 성과나 대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결합해서 협력하는 것 자체로부터 새로운 부가 형성된다. 그러한 부는 말하자면 공통의 부의 풀(pool)을 이루고 있다. 그 공통의 ‘풀’에서 부를 이끌어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산이 개개인의 노동능력의 결과나 성과라고 생각하는 한, 이 발상은 나올 수 없습니다. 부라는 것은 공통의 풀을 이루는 것이라는 발상이 없으면 안됩니다. 여기에 더글러스의 독특한 주장이 있지만, 그는 문화적 유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엔지니어로서의 현장체험에서 나온 인식입니다.

  그에 의하면 생산의 90%는 도구와 프로세스의 문제이며, 노동자의 능력은 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도구와 프로세스가 생산이라는 것을 대부분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을 결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문화적 유산이나 전통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도구나 지식이나 기술은 그러한 유산이나 전통에 속한 것입니다. 인류는 몇만년에 결쳐 그러한 지식과 기술을 팽대하게 축적해왔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새삼스럽게 불의 사용법을 배운다거나 차바퀴를 발명한다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몇천 세대가 축적해온 것을 우리는 향수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인류의 그러한 위대한 문화적 유산의 상속인입니다. 그러한 상속인으로서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부라는 것은 공통의 ‘풀’로서 사람들의 협력과 결합에서 생겨나고, 동시에 문화적 유산으로서 과거의 여러 세대도 그 창조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이 국민배당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연은 놀라운 부를 인류에게 부여하면서도 아무런 보답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는 신(神) 내지 자연이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에서 안식일이라는 습관은 부가 인간의 노동의 성과가 아니라 신의 선물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도 국민배당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논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국민배당으로 사람들에게 소득, 구매력을 보장하지 않는 한, 경제는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따라서 공황을 예방하는 경제적 방책이라는 것도 국민배당을 정당화하는 이론적인 논거가 됩니다.

  이 국민배당은 내용적으로는 바로 기본소득이지만, 국민배당이라는 용어 쪽이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기본소득’, ‘기초소득보장’이라는 용어를 쓰면, 통상 ‘소득’은 고용이나 노동에 결부되어 있는 관념이기 때문에, 뭔가 일도 하지 않고 그런 소득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발이나 의문이 나옵니다. 그 점에서, 국민배당이라는 용어가 좀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회신용론과 기본소득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도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꽤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아무래도 그 논거라든가 사상적 근거가 애매한 게 사실입니다.

  인도적인 배려에서 한다는 것인지, 복지국가를 완성시키는 데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복지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인지 불확실합니다. 그 점에서 사회신용론에서는 소득보장을 하지 않으면 공황으로 된다는, 이론적으로 확실한 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소득론의 논거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더글러스의 사회신용론의 궁극적 목적은 은행과 대기업의 고도로 조직된 권력, 영향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키고,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는 사상이야말로 사회신용론의 말하자면 철학적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반드시 재원의 문제에 부딪칩니다.

  이것을 소득세로 해결하려면 우선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소득세로 한다면, 기본소득이라는 것은 부자들의 돈을 뜯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려주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되어 심히 껄끄러운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소비세로 하면 어떨까 하는 게 독일의 베르너의 의견이지만, 그러면 터무니없이 높은 소비세율이 되고 맙니다. 모처럼 소득을 보장하더라도 상품가격이 높아져서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사회신용론에 입각한다면 재원 문제는 일절 염려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공공통화로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지폐를 마음대로 찍어내어 뿌리자는 게 아닙니다. 생산능력이 있고, 인민의 필요 내지는 수요가 어떤 정도로 있다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통화를 발행하여 기업에 융자한다면 경제는 순조롭게 돌아갑니다.

  “재원이 난관”이라는 발상은 국가의 수입원은 세금과 국채밖에 없다는 발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공통화로써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재원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서민들이 그것을 통화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모처럼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통화인데, 익숙하지 않은 돈이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재원의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득에 대한 권리’라는 사상

그러나 소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직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소득은 고용에 의해서만 얻어질 뿐이라는 생각은 여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고용 말고는 부를 분배할 수 없다는 발상에서는 자민당도 공산당도 마찬가지여서, 입을 맞추어 고용을 유지해야 한다고 소란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것은 “고용을 유지하라”는 슬로건이 아니라 ‘소득에 대한 권리’라는 사상입니다. 원래 기업의 사명은 소비자에게 양질의 상품을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지, 고용을 유지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종업원의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료비를 깎아 조악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을 세상이 인정해줄까요. 그리고 소득이 있어야 잠재적인 수요가 유효수요가 되어 시장이 활성화됩니다. 그러면 기업활동도 활발하게 되어 고용이 확대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고용을 유지하라”는 것은 전혀 본말전도입니다.

  물론 눈앞에 파견 노동자가 있고, 실업자들이 있다면 취업 알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제 시스템을 전체로서 분석해보면 고용지상주의는 전혀 맞지 않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비즈니스는 하지 않고 예술이나 학문이나 문화활동에 관계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매력으로 경제에 공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화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국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의 존속을 위태롭게 합니다. 그것이 현대라는 시대입니다.

 

활 인프라로서의 돈

돈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원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원활히 손에 넣기 위한 수단, 그 목적으로 부의 분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더글러스가 A+B 정리로 말하고 있는 것의 근본은 거기에 있습니다. 돈은 본래 분배의 수단인데도, 은행의 이익이 그것을 생산의 수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업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차차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즉, 현대에 있어서는 생산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분배이며, 그런 이유로 돈을 분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시점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 돈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티켓 같은 것, 경제생활에 참여해서 사회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한 티켓인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현대의 빈곤이라는 것은 단지 빈핍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현대에 있어서는 돈은 일종의 생활 인프라, 전기나 수도 같은 생활 인프라라는 것입니다. 돈이란 뭔가 신비적인 힘을 발휘하는 특권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주물숭배(呪物崇拜)적인 발상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돈을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으로 보는 것 자체가 주물숭배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민이 합의한 공공의 이익에 기초해서 발행되는 공공통화 및 국민배당은 돈을 사람들의 생활 인프라로 바꾸기 위한 제도입니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장사를 하여 돈을 버는 것도 허용됩니다. 그러나 돈은 그 이전에 기본적으로 생활 인프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가 이상하게 돼버립니다.

 

사회신용에 의한 자본의 분산화

이 점에서는 사회신용론을 자본의 집중이냐 분산이냐 하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해양상업에 진출한 17세기, 나아가 산업혁명이 진전된 19세기 이후에는 자본의 거대한 집중이 필요해졌습니다. 은행은 자본을 집중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일본은행이나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중앙’ 은행이라고 불리는 것은 거기에 자본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자본과잉 시대에는 자본을 집중시켜두면 자본은 월스트리트의 카지노 자본주의의 밑천이 되어 세계경제의 붕괴를 초래합니다. 이에 대해 기본소득은 자본을 개인이라는 궁극의 단위까지 철저히 분산시켜, 경제를 안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공통화의 발행에는 동의하더라도 기본소득에는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일하지 않는데 소득을 얻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이라는 것을 ‘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운 것을 참고 일을 한 데 대한 보상으로 돈을 받는다고 하는. 그들은 인생은 원래 괴롭고 비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용에 근거하지 않는 소득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신용론의 3개 기둥

그런데 더글러스는 국민배당 내지는 기본소득만으로 민중의 구매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신용론에는 실은 3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공공통화가 그 하나입니다. 거기에 국민배당. 그리고 정당한 가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가격만이 ‘정당’한 가격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를 들어, 지난 사분기 일본경제에서 가령 생산의 총계가 100, 소비의 총계가 75라고 합시다. 그러면 25%의 간극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 간극과 같은 비율로 소매가격을 일률적으로 인하하면 될 것입니다. 판매부문에서 모든 상품의 가격을 25% 할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가격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루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매부문을 일방적으로 손해 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소매부문은 매출전표를 보관하고 있다가 국가로부터 할인한 25% 몫을 나중에 보상받습니다. 그래서 더글러스는 이 정당가격을 ‘보상받는 할인(compensated discoun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비세와는 180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판매부문에서는 팔면 팔수록 돈을 버는 상업의 논리가 부정되지 않습니다. 다만 가격을 마음대로 끌어올려 돈벌이를 하는 것이 부정됩니다. 이 할인에 의해 소비와 생산이 균형을 이루고,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정당가격에 의해 이미 기본소득으로 보강된 서민들의 구매력이 더 강화되고, 확대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가격은 말하자면 소비를 보장하는 조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소매부문에 대한 소득보장이기도 합니다.

  이 3개의 기둥이 결합함으로써 생산과 소비가 완전히 균형을 이루어 통화가 원활히 흘러 경제가 동맥경화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신용론을 “요컨대 돈을 마구 뿌리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하면 난폭한 인플레가 발생한다고 우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인플레나 디플레, 불황이나 공황은 은행이 실체경제의 생산이나 소비와는 관계없이 돈을 풀거나 거둬들이는 게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회신용론에서는 통화는 어디까지나 국민경제의 잠재적인 생산과 소비 능력을 표시하는 통계 데이터의 집계, 분석, 예측에 기초하여 공급됩니다.

  그러니까 경제가 만일 인플레 기미를 띠면, 그것은 데이터에 오인(誤認)이 있거나 분석에 오류가 있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오인이나 오류가 있는가를 검토하여 정책을 재조정한다면 인플레는 해소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기상청이 일기예보를 수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신용의 자본 흐름

더글러스는 통화를 관리하는 부서를 ‘내셔널크레디트오피스’, 국가신용국(國家信用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때로는 국립은행이라고도 쓰고 있습니다. 일본은행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진짜 국립은행입니다. 공공화폐를 발행하여 그것을 이자 없이 융자합니다. 이 공공통화는 교육이나 의료나 공공 인프라의 정비 같은 공공성이 높은 것에 물론 융자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것과 기업의 관계입니다.

  기업에 대해서도 공공통화는 무이자로 융자됩니다. 기업은 그 돈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상품을 만들면 됩니다. 기업이 출하한 상품은 도매상을 거쳐 소매점으로 갑니다. 이것은 생산의 면입니다.

  다른 한편, 기업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합니다. 노동자는 그 임금을 가지고 소매부문에서 물건을 사는 소비자가 됩니다. 소매 단계에서 생산과 소비가 만납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국민배당이 월 10만이면 10만 나옵니다. 다른 한편, 소매상은 옷가게를 한다든지 하면, 상품을 사들이기 위해 국립은행에서 100만엔을 당좌 대출로 빌립니다. 그리고 옷들을 할인한 정당가격으로 팝니다. 그러면 소매상은 매상고에서 무이자로 빌린 자금을 은행에 갚습니다. 국립은행 쪽은 그때에 할인한 몫을 소매상에게 보상합니다.

  이로써 인플레는 일어나지 않고 서민들의 구매력은 확보됩니다. 사람들은 상품 대금을 소매점에 지불하고, 소매점은 그 돈으로 기업에서 출하된 상품 대금을 지불함과 더불어 은행에서 빌린 자금을 돌려주고, 기업은 소매점에서 온 대금으로 국가에서 융자받은 자금을 갚습니다. 이것이 통화가 회수되는 과정입니다. 돈의 흐름은 완전히 생산과 소비의 리듬에 일치하고, 그에 따라 통화가 공급, 회수됩니다. 그러니까 경제의 어떤 부문에서도 돈이 체류하여 경제가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게 끊임없이 순조롭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여 통화가 윤활유가 되어 경제가 순조로운 사이클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신용론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한다면 그 액수는 어떤 정도가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사회신용론에 입각한다면 국민경제의 계산을 통해 어느 정도 객관성 있는 지급액이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미국에서 사회신용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리처드 쿡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최근 오바마 대통령에게 미국경제 재건안(再建案)을 보냈습니다만, 오바마가 상대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 제안에서 그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월 10만엔, 아이들에게는 5만엔 정도의 기본소득금을 지급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총경비가 3조6천억 달러, 미국인의 개인 부채 총액과 같은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안(案)은 미국의 노동자가 소득부족을 신용카드 등으로 보충해온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본 가계(家計)의 경우는 미국만큼 부채 지옥은 아니기 때문에 쿡과 같은 논리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기본소득이 월 50만엔이 되면 인플레가 될 것이고, 월 1만엔으로는 경제순환을 지탱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중간에 적절한 목표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재정적자 해소, 사회신용에 의한 공공사업, 세금의 폐지

공공통화를 제도화한다면, 일본국의 800조라는 재정적자는 전부 탕감 가능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돈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면 돌도, 나무 잎사귀도 돈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공공통화로써 소득을 보장하게 되면, 모두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유통되는 훌륭한 돈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행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일본은행권과 태환성(兌換性)을 가진 돈으로 발행된다면, 은행도 당연히 거래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리 되면 은행이 갖고 있는 막대한 일본국 채권을 순차적으로 공공통화로 매입하여, 적자를 제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은행 쪽에서 보자면 자신의 자산이 감소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항하겠지만. 그렇지만 한꺼번에 800조를 갚는다면 경제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공사업을 사회신용론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령 어디에서 자치체가 다리를 건설한다고 하고, 업자가 입찰(入札)한다고 합시다. A, B, C, D라는 업자가 입찰해서 A가 10억엔으로 낙찰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는 국가로부터 무이자로 이 다리 공사를 위한 자금을 융자받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준공되면 자치체가 A에게 10억엔을 지불합니다. A는 그것으로 당좌 대출받은 자금을 국가에 반환합니다. 그리고 다리가 높은 공공성이 인정된다면 국가는 그 자금을 자치체에 돌립니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직접 자치체에 융자를 해주는 것과 거의 같지만, 이 경우는 자유경제와 공공통화를 양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감가상각비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몇십년인가 경과해서 다리가 부실해지면 다시 교체할 필요가 나옵니다. 그 감가상각비가 예를 들어 500만엔이라 합시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것인가.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정당가격이라는 방책이 있습니다. 이 500만엔만큼 정당가격을 올려 증가분을 공공사업 관계비로 충당하면 됩니다. 그 결과, 이런저런 공공사업을 하게 되면 즉시 물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면 공공사업에 대해서 인민은 극히 민감해지게 되는 게 아닐까요.

  앞에서 국가의 재정적자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장차 공공통화가 제도화된다면 세금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세금은 정부의 인민에 대한 강도행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본래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세금은 약자를 괴롭히는 제도입니다. 부자들은 어떻든 탈세나 재산 은닉의 방법이 있습니다. 대기업은 아무리 법인세를 부과하더라도 그것을 상품가격에 전가시킵니다. 다른 한편, 샐러리맨들은 급여에서 원천징수당하고, 그래서 귀가 도중에 울적함을 달래려고 술집에서 맥주나 소주를 마시면 거기에도 세금이 부과됩니다. 마치 중세의 농노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세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교육ㆍ의료 인프라의 정비 등 현대국가의 공공서비스는 아무리 돈을 많이 잡아먹어도 손을 떼거나 축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공공통화는 무이자로 융자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여기에 1-2%의 이자를 붙여서 그것을 국가의 수입원으로 하면 어떨까요. 공공통화에 의한 융자는 국민경제의 대동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설령 1-2%의 이자라도 나라의 수입은 막대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방책에는 세금과 달리 부정이나 불공평이라는 것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은 이 방책에는 실례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북(北)다코타주에는 ‘북다코타은행’이라는 20세기 초에 서부 농민운동이 낳은 미국에서 유일한 주립은행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역경제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창설된 은행으로, 오늘날 미국의 거대은행의 위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은행의 이자수입은 주정부의 수입이 되고 있습니다. 이 덕분에 미국 50개주 가운데 46주가 거의 파산상태지만 북다코타주의 재정은 흑자입니다. 이 실례를 보더라도 국가의 수입원이 세금과 국채라는 것이 어떻게 경제와 정치를 뿌리로부터 왜곡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중지(衆智)를 결집한 플랜 만들기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본소득이건 공공통화 발행이건 정작 실행한다고 하면 그 방식은 나라의 정황이나 역사의 차이 때문에 국가마다 천차만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국정(國情)에 제일 적합하고,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안(案)은 어떤 것인가를 중지를 모아서 생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통화, 국민배당, 정당가격,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구체적인 세부방식은 여러가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공공통화로써 공공성이 높은 기업에 융자하는 것은 좋지만, 파친코 업소에 융자하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친코가 서민들의 오락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융자하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공공통화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민간은행에 일정한 역할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분준비제도에 기초해서 무(無)로부터 환(幻)의 돈을 만들어내는 것은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만가지 악(惡)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민간은행은 어디까지나 저축되어 있는 예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수수료를 버는 것만의 견실한 금전 중개업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리처드 쿡에 관해 언급했습니다만, 그의 제안은 월 10만엔 정도의 기본소득을 지폐가 아니라 쿠폰으로 분배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어디까지나 의식주에 사용해야지 술이나 노름에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취지에서 쿠폰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기본소득을 술이나 노름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은 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이것도 여러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공공통화의 발행을 위해서 국립은행을 새로 만들 것인가. 일본은행이나 일본은행권을 그대로 남겨두고 핵심을 환골탈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신용론의 구체적인 방식은 역사와 국정에 따라 실로 다양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회변혁의 도구로서의 기본소득

여기서 내 개인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메이지 유신 이래 도쿄 일극(一極) 집중이라는 일대 해악이 있어왔습니다. 도쿄만이 글로벌 도시가 되고 지방은 식민지화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기민(棄民) 지역 같은 것이 된 지방도 있습니다. 지방이 다시 소생한다면, 그 농업, 지역산업, 중소기업이 다시 살아난다면, 거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 좀더 생태적인 경제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본소득을 실시할 때에는 수도권을 5년 정도 소득보장 대상으로부터 제외시키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지방에서 살면 기초소득이 보장되니까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 특히 젊은층이 우르르 지방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도쿄의 샐러리맨이지만, 가능하다면 샐러리맨 신세를 벗어나 지방에서 유기농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농업에서 자립하는 데에는 10년 이상 걸립니다. 기초소득이 있다면 그 사이에 안심하고 농사일을 습득하는 데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젊은이가 오면, 사람이 오니까, 그것만으로 수요가 생겨나고, 비즈니스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수도권은 일정기간 보장대상에서 제외하는 쪽이 좋다는 게 내 의견입니다.

  이런 내 의견에 여러분이 찬성하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기본소득은 이런 식으로 사회변혁에도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경제위기는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황에 더하여 지구온난화나 원유생산 체감이라는 이중적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녹색 뉴딜’에 의해 태양광 발전을 보급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위기, 문명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기에는 학자나 관리는 더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문명의 전환을 위해서는 무수한 이름 없는 사람들이 풀뿌리 차원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그러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실험을 시도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줍니다. 실패나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기본소득이라고 하면, 고용이나 소득을 둘러싼 불안을 없애주는 것이라는 그 복지효과에 우리는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회적인 실험이 용이하게 된다는 게 그 가장 중요한 의의라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습니다.

 

당파를 초월한 논의에 기대

기본소득은 결코 당파적인 주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쟁 전의 사회신용운동이 좌절된 이유의 하나가 가령 캐나다에서 더글러스의 논의가 큰 평판을 얻게 되어 당파가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신용당이라는 정당이 결성되었고, 게다가 그것이 알버타주에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좋지만, 결국 사회신용운동의 이름에 값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론에 일종의 우익정당으로 비치게 되었습니다. 더글러스는 당초에는 이 정당에 조언을 했지만, 나중에는 단념하고 비판적인 글을 썼습니다. 그러한 쓰린 경험이 있습니다.

  기본소득, 공공통화, 정당가격은 이성과 양심에 기초한 초당파적 정책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는 재계인사 중에도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가난한 사람 중에도 절대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것은 이데올로기나 계급투쟁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회신용론에 관해 인터넷 등을 통해서 여론을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설득과 토론, 오로지 이성과 양식에 기초하여 설득과 토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에서 사회신용운동은 바로 민주주의의 실천 그 자체입니다. 사회신용론을 실천하여 손해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기업도, 국가도 전부 득을 봅니다. 은행만은 손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행도 공황으로 파산하는 것보다는 견실한 지역은행으로 살아남는 쪽이 좋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왜곡된 사회구조 덕분에 개인적으로 권세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권력자들만은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의 저하를 두려워해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단지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반대할 뿐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대는 더이상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시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별개의 초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소득은 고용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기본적인 자연권에 속하는 것이라든가 하는 초점입니다.

  현대사회는 앞으로 이 초점을 둘러싸고 요동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더 캐보면, 이것은 돈에 대한 사고방식의 대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은 특권과 권력의 행사를 가능케 하는 신비스러운 주술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게 아니라 돈은 만인이 인간답게 생활을 자유롭게 향수하기 위해 사회적 연대로부터 태어난 생활 인프라의 일종이며, 그 돈으로 인간은 아름답고 즐거운, 불안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이 두개의 생각의 대립입니다.

  그리고 실제 이것은 시대의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오바마 붐’의 미국에서도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중에서 사회신용론과 비슷한 주장을 제기하는 움직임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연방준비은행을 폐지하라, 기본소득을 실시하라, 라는 제안은 적어도 온라인 미디어에서는 이미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은 미국에서 최초로 기본소득의 실현을 제창한 사람이 공민권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연쇄반응처럼 퍼져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기대를 해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공황이라면, 공황은 사회신용론이 제시하는 3개의 방책, 공공통화, 국민배당, 정당가격, 특히 앞의 두 가지 방책에 의한 방법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김형수 옮김)


  세키 히로노(關曠野, 1944―  )의 이 글은 일본의 시민단체 <기본소득 실현을 탐구하는 모임>이 2009년 3월에 주최한 한 모임에서 행한 강연 기록을 필자 자신이 나중에 정리하여 인터넷에 공개한 것인데,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기본소득’의 의의와 그 실천방안을 ‘사회신용론’에 입각하여 고찰하고 있는 이 강연의 논지는 그 참신한 관점과 보편적인 설득력으로 인해 한국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될 만하다고 여겨져 여기에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일본에서 평론가이자 재야의 사상사가(思想史家)로 활동하고 있는 세키 히로노 씨의 저서에는 《플라톤과 자본주의》(1982),《자본주의-그 과거, 현재, 미래》(1987),《민족이란 무엇인가》(2001) 등이 있고, 그가 최근에 쓴 글 <자급의 논리, 무역의 논리>가《녹색평론》2009년5-6월호에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의 원문을 볼 수 있는 인터넷 주소는 http://bijp.net/sc/article/27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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