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8호 2009년 9-10월호  인쇄용  

 

  민주주의를 위하여 (2)

  김종철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안다.
어느 날 이 시스템이 붕괴될 것임을.   ―존 버저
 

‘경쟁력’ 속에 방치된 아이들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산업국가들에서 출산율이 낮은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그 경향은 비상사태라고 할만큼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그리 멀지도 않은 장래에 한국인이라는 종족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구감소 추세를 기반으로 해서는 복지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도, 산업국가로서의 현상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좀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출산율 저하를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생태적 수용능력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고려할 때, 인구감소 추세가 반드시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은 좀더 철저히, 다각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테마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와는 별도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의 배후에 있는 본질적으로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인간관이다. 즉, 출산율 저하에 대한 우려가 주로 산업국가 내지 복지국가로서의 체제 유지에 필요한 인력―노동자, 병사, 소비자, 납세자, 연금불입자, 보험가입자―이 부족할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해 있다고 한다면, 이 논리에 우리가 선뜻 동의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개인 각자를 그 자체로 존엄한 인격적인 존재로 여긴다면, 이것은 쉽게 말하기도, 듣기도 거북한 논리이다. 따져보면, 이러한 논리 속에는 인간존재에 대한 심히 모멸적인 시선이 들어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국가나 자본 혹은 복지체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발언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다분히 도구시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무례함과 몰이해를 드러내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인생까지도 비하(卑下)하는 기묘한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의 상황에서 출산율 저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좀더 깊이 헤아려보려는 자세이다. 사실, 관점에 따라서는 출산율 저하라는 현상 자체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왜 출산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게 바람직한 것이냐 않느냐를 떠나서 검토해볼만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갖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지 국가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시스템 속에서 어떠한 사적인 영역도 이 시스템의 영향이나 압력을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 저(低)출산 현상이라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청춘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을 하거나 않은 채,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인생사업이지만, 그것은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고, 표출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오늘날 왜 결혼을 망설이며, 아기 낳기를 꺼려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이 출산을 단념하는 무엇보다 큰 이유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 속에서는 아기를 안심하고 낳아 기르는 게 불가능하거나 감내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혹은 전통적인 인간관이나 윤리관에서 이탈한 젊은 세대의 감각으로는 이제 아기를 낳아 양육하는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는 핵가족이 주류가 된 한국사회에서, 안정된 직장, 소득, 집이라는 가족생활의 일차적 요건을 확보하는 일마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점점 모험에 가까운 일이 되고 있다. 거기다가 아이들이 헤쳐나가야 할 극심한 교육지옥을 감안하면, 아기를 낳을 엄두를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책임한 범죄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아기를 낳고 기르는 부모나 어른의 입장에서 출산문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우리가 매일 듣고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실로 기막힌 최근의 한 증언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작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진보성향’의 후보를 지원했다고 해서 국가공무원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 가운데서 나온 증언이다. 이 재판에 피고인으로 나온 교사들 전원의 발언이 모두 경청해야 할 것들이지만, 그중에서 허 아무개 교사의 최후진술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했던 자원봉사 활동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 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원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한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      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니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한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개를 다닌다       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이런 교육을 바꾸자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이것이 죄인가? (〈오마이뉴스〉 2009년 8월 17일)

이것은 픽션이 아니라 한 교사의 실제 경험담이다. 이 경악할만한 이야기는 우리가 국가니 교육이니 하는 이름으로 현재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이 과연 윤리적으로 최소한이나마 정당화할 수 있는 체제인지, 심각하게 물어볼 것을 요구한다. 지금 이 나라의 권력자들과 유력 언론과 교육기관은 입만 열면 ‘선진화’를 운위하고, 끊임없이 ‘국가경쟁력’에 대해 말하면서도 아이들의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그것은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는 8살짜리 아이의 기막힌 항변이 명확히 입증하고 있다. 한 사회의 인간다운 존속을 위한 기초 중의 기초인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과연 어떤 ‘선진사회’ 건설이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문제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죄 없는 아이들이 언제까지 이 야만적인 시스템 속에 방치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재판에서 검찰은 교사들 전원에 대해 징역 6개월에서 2년 2개월까지의 실형을 구형했다. 이런 희극적인 사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상적으로 끝없이 재연되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용산참사와 권력의 무도(無道)함

아이들의 삶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망가뜨리는 파괴력은 결국 동일한 시스템 작동 원리에서 나온다. 그것은 약자들의 희생 없이는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자본의 논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논리가 결합된 ‘폭력’의 메커니즘이다. 그 폭력은 대체로 시민들에게 법과 규율의 준수를 강제하는 일상적인 권력으로 나타나지만, 때때로 숨겨진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야만적인 폭압을 자행한다. 용산참사는 그 전형적인 예이다.

지난 1월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은 사건 발생 후 8개월에 접어든 지금까지 저승길에 오르지도 못하고, 병원의 차디찬 냉동고 속에 숯덩이가 되어 누워 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은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그리고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유족들과 시민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에 기약 없이 계속되고 있다. 당국은 유족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사태 해결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을 탄압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검찰은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피해자를 처벌하기로 작정하였고, 재판 과정에서는 온전한 수사기록도 내놓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변호사들이 사임함으로써 재판 거부의사를 명확히 밝혔음에도, 재판은 강행되고 있다. 이 상황은 거의 식민통치를 방불케 한다. 식민지는 행정 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는 입법 혹은 사법 권력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용산참사는 단순한 공권력 남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산과 생계수단을 지키려던 소시민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 자체의 끔찍함 못지않게 그 사후처리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드러낸 비할 데 없는 무도(無道)함 때문에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상흔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이명박 정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멍에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책임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따져보면 정권의 이런 행태가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용산문제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재개발에 관한 법령만 하더라도 그렇다. 현행 도시재개발법과 그 시행령은 예전에 비해 개선된 것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서민들의 재산을 사실상 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재벌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령은 이른바 민주정부라고 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 통해서 개정·정비되어온 법령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민주정부를 표방하더라도 국가란 기본적으로 권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국가란 본래 풀뿌리 민중의 삶에 대하여 진정으로 친화적일 수도, 우호적일 수도 없는 권력기구이다. 국가는 징세(徵稅)와 공공사업과 복지서비스라는 형태를 통해서 재분배라는 기능을 행사하지만, 그 재분배란 근본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민중에 대한 수탈을 지속하기 위한 방책일 뿐인지도 모른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라는 괴물은 자기확대의 욕망 때문에 쉽사리 자본과 손을 잡으면서, 풀뿌리 민중의 요구는 간단히 무시하거나 외면해버린다. 이것은 국가의 체질화된 뿌리 깊은 습성이다.

국가의 자기확대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와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국가가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적대적이거나 적어도 경쟁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권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국가는 자본과 그 성격이나 기능이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권력의 확대재생산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 자본의 논리와 쉽게 결합하는 것이다.

용산참사는 도시재개발 때문에 생계수단을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된 소시민들의 저항에 국가 공권력이 과잉 대응한 결과 빚어진 참혹한 사건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 배후에는 건설자본의 만족을 모르는 탐욕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그 사실을 결코 시인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따라서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사건의 완전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느 모로 보나 재개발이 되면 십중팔구 피해를 입게 될 서민들 자신들이 개발이나 재개발이라는 논리에 현혹되어,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풍조이다. 용산참사로 인해 도시재개발의 허구성과 사기성이 확연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발 혹은 재개발 논리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제성장, 민주주의의 적(敵)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에서 사회적 양식(良識)과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데에 가장 큰 위협이 바로 기득권층, 서민층을 막론하고 광범하게 퍼져있는 개발 혹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인지 모른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특목고, 뉴타운 따위 개발 공약들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성립된 것도 결국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인정받은 ‘개발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좀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부유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크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풍요로운 생활은 빈자(貧者)의 이상”(한나 아렌트)이라는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운 진실이 담겨 있다. 더욱이 억압적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소외된 노동에 종사해온 노동자들에게는 차원이 다른 노동형태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의 현실적 욕망은 간소한 생활이 아니라, 부자들처럼 유복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되기 쉽다.

게다가 지금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사심 없는 덕(德)의 실천을 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자기 자신을 잊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옛 전통사회들에서 찬양받는 숭고한 자질이었다. 그러나 이익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선행을 한다는 이 멸사(滅私)정신은 이미 개인의식이 견고하게 뿌리박은 현대사회에서는 보편화되기 어려운 덕목이며,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강조한다면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 이익을 출발점으로 하지 않은 도덕론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그대로 공동체의 전체적 이익과 조화 내지는 양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토크빌이 언급한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이다.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했던 이 프랑스 지식인의 눈에 비친 미국사회의 괄목할만한 특징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가 특히 주목했던 게 미국에서는 구대륙과는 달리 ‘이익을 떠난 희생이라는 관념’이 희박하다는 사실이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덕행은 숭고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사람들은 동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그런 희생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위대한 것은 무사무욕(無私無慾)이 아니라,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다.(《미국의 민주주의》 제2권)

170년 전에 토크빌이 미국에서 본 것은 상업적 동기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덕행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모든 근대적 사회의 보편적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상업적 동기’라는 말에 반드시 부정적인 뉘앙스만 있는 게 아니다. 토크빌은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으로써 ‘상업적 동기’의 긍정적 기능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사를 할 때에도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는 게 장기적인 이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듯이, 인간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거나 좁은 국면에서는 자기희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이익이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장기적, 포괄적, 심층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다. 그렇게 본다면, 토크빌이 말하는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 개념은 사적 이익을 중심에 두는 그 심리적 동기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통사회에서의 덕행과 크게 다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

요컨대,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기이익이 ‘올바르게 이해된’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경제성장 혹은 개발 논리에 대해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이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대국가와 자본은 계속적인 성장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확대재생산 없이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국가권력이 경제성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주로 고용문제와 세수(稅收) 때문이다. 특히 고용문제가 심각해지면 사회적 안정이 흔들리고, 그 결과로 권력이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늘 경제성장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제성장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원과 에너지의 끝없는 소비를 불가피하게 하는, 한마디로 지속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성장개념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구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도 국가는 기껏해야 ‘녹색성장’을 운위할 수 있을 뿐이다. 녹색이란 무엇보다 인간생존의 자연적 한계를 예민하게 의식하는 토대 위에서 비폭력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로 성장논리와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속임수를 계속 행하는 것은 국가의 성격상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래 자본주의와 밀착하여 형성·전개되어온 근대국가에는 본질적으로 경제성장이라는 고식적 방식 이외의 모델을 구상할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권력을 나누거나 양도하고 싶지 않은 국가의 완강한 체질이란 게 있다. 즉, 오늘날 거대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성장체제는 권력의 분산을 거부하는 내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경제성장을 통해서 국가와 자본이 행사하는 권력이 갈수록 강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국가와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통제권 바깥에서 자립적인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자주적 정신들의 존재이다.

개발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성장하면 재화와 서비스가 증가하고, 고용의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 안될 것은, 이렇게 증대된 부(富)라는 것은 언제나 민중의 자립적 삶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전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 이전에 기본적으로 기층민 공동체를 파괴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원시적 자본축적 단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용산참사도 결국 이런 역사의 연장에서 발생한 비극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역사의 흐름은 조만간 생명의 원천인 물과 농사와 하천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해버릴 것이 틀림없는 난폭한 공사를 ‘4대강 살리기’라는 실로 교활한 이름으로 서두르고 있는 오늘의 기막힌 사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개발이나 경제성장을 통해서 민중이 누리는 혜택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몇푼의 임금 내지 급료를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민중은 자립적인 삶의 바탕을 잃고, 상호부조의 호혜적 공동체를 잃고, 자유와 존엄성의 근거를 잃는다. 게다가 이제는 몇푼 안되는 돈이나마 벌 수 있는 일자리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벌써 여러해 전부터 세계는 고용 없는 경제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금 과잉축적, 과잉생산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체제에서 기업들은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계화, 자동화를 통한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구조조정이란 노동자들의 목을 대대적으로 자르는 것을 뜻하는 완곡어법이긴 하나 결국은 거짓 언어이다. 사람의 밥줄을 가차 없이 끊는 행위를 구조조정이라는 말로 부른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자본주의 문명이 도달한 비윤리성이 어떤 수준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끔찍한 것은 그렇게 사람의 밥줄을 대량으로 끊어놓으면 당장 기업의 주가가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산업문명의 종언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자본주의 산업문명도 종언을 고할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지금 세계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파국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못지않게 에너지·식량위기에 대한 불길한 전망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위기에 맞물려 있는 금융대란과 그에 따른 세계적인 경제위기도 언제 어떻게 극복될 것인지, 과연 극복이 가능하기는 할 것인지,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 모든 위기들은 근본적으로 화석연료 의존의 산업문명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산업문명이 이제 도리 없이 종언을 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첫째, 지구온난화 현상이 더이상 화석연료의 무제한적인 사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둘째, 가장 중요한 화석연료인 석유가 이미 생산정점에 도달했거나 곧 도달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대재앙을 회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이후 석유가격은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고, 그에 따라 석유에 의존해온 그동안의 온갖 산업 및 노동, 생활양식, 정치, 문화, 사회적 제도, 관습 등 일체가 극단적으로 축소되거나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다.

수년전 미국의 작가 하워드 컨스틀러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여 《장기(長期) 긴급상황》(2005)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는 인류사회가 앞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일종의 긴급피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임을 그의 책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석유가 풍부하게 공급되는 상황이 종식된다면, 그동안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생활방식은 대부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에 의하면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석유는 단지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산업주의 삶의 양식에 불가결한 온갖 제품의 원료이기도 하다. 석유는 비료와 농약의 원료이고, 약품의 원료이기도 하다. 석유가 없으면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식량도 옷도 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컨스틀러는 이 모든 불길한 사태의 첫 신호로 비행기 운행이 중단 혹은 축소되는 사태를 예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행기가 산업문명이라는 탄광의 붕괴를 알려주는 ‘카나리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다가오는 붕괴에 대해 컨스틀러가 내놓는 대책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세계 전역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여 자립과 협동, 연대의 가치를 옹호해온 많은 분권적 사회주의 사상가, 혹은 에콜로지스트들이 일관되게 제시해온 방안, 즉 자립적·협동적 농사가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로의 귀환이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대변환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석유에 기반을 둔 산업문명의 종식은 온갖 뒤틀린 가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컨스틀러에 의하면, 석유문명의 종말은 사막 위에 건설된 퇴폐와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의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석유가 고갈되면 도리 없이 사람은 정직하게 땀을 흘려 노동하지 않을 수 없고, 소련 붕괴 후 쿠바가 그랬듯이 농사도 전면적인 유기농 체제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수 인구가 소규모 공동체로 돌아간다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은 비로소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자유인들의 생활에 국가나 자본의 논리는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거기서는 출산율이 저하되는 일도 없겠지만, 설령 출산율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복지체제와의 관련에서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은 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구히 산업국가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외의 삶의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산업국가는 뿌리로부터 극복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유제(遺制)이다. 산업국가의 틀은 그것이 아무리 복지체제를 갖춘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근원적인 질곡일 뿐이다.

우리는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고, 서민들이 어떻게 하면 부유해질 것인가를 궁리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상황에서만 인간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경제성장이나 개발을 통해서는 활로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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