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7호 2009년 7-8월호  인쇄용  

 

  민주주의를 위하여 (1)

  김종철

 

  국가권력의 횡포가 점입가경이다. 이명박 정권이 지금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억압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은 소위 ‘법치’의 확립이다. ‘법치’가 확립돼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선진국에서 도시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까지 빼앗고도 국가권력이 단 한마디의 사과는커녕 오히려 희생자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사례가 있는가. 그리고 민주사회의 존속에 불가결한 언론, 집회, 표현의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를 거침없이 유린하는 선진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따져보면, 지금 실제로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국가권력 자신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일이다.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하고 국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끄는 정부에 의한 공권력 행사는 위헌적이라기보다는 완전히 헌법 자체를 비웃고 있다. 도대체 이 나라에 헌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정부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이 정권의 헌법 무시 태도는 도를 넘어도 너무 넘어섰다.

  원래 헌법을 위시한 모든 법률은 시민들의 행동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제약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쉬운 국가권력을 경계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천명하고 있는 헌법이라면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기본적으로 헌법은 정부에 대한 ―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 명령이다. 이 명령을 엄격히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비로소 국가권력은 국민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권력의 정당성은 단지 선거를 통해서 집권했다는 사실만으로 확립되는 게 아니다. 히틀러도 선거에 의해서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촛불시위 이후 시민들로부터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온갖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면서 전방위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이명박 정권은 이제 강권통치에 깊이 중독되어버린 게 분명하다.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고 해서 방송국 피디와 기자와 작가들을 끝없이 괴롭히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개인의 사적 영역에 속한 이메일까지 뒤적여 꼬투리를 찾아 그것을 공개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시국선언 교사들의 목을 자르고, 그들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는 무법천지의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시민들의 인격이나 자존심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게 틀림없다. 그저 노예나 가축처럼 고분고분 순종하기를 바랄 뿐,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는 타도해야 할 적(敵)일 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느새 이 나라가 노골적인 경찰국가로 전락해버린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인간존엄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노와 슬픔과 깊은 좌절감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선례로 볼 때, 이러한 권력의 횡포가 장기화되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권력 자신의 처참한 몰락일 것이지만, 또한 그 사이에 우리들의 삶도 크게 손상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지금 이렇게 자꾸만 자신의 묘혈을 파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이유의 하나는 시민들로부터 심각하게 고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고립의 바탕에는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은 특히 작년 봄에서 여름까지 계속된 대대적인 촛불시위로 인한 영향인 듯하다.

  사실, 작년의 촛불시위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촛불시위를 통해서 시민들이 그 정당성을 부정해버렸던 정권 그 자체는 불과 몇달 전에 민주적 절차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었다. 그 몇달 사이에 이명박과 이 나라의 보수권력층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이 원래 도덕성이 결여된 정치세력이라는 것은 선거 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유권자들은 그들에게 정권을 맡겼던 것이다. 그래 놓고 나서 불과 몇달 후에 쇠고기 협상의 잘못을 이유로 그 정권에 대해 극도의 실망과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물론 쇠고기 수입문제가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권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방기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개탄할 만한 일이지만, 따져보면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싸고 보여준 정부의 태도는 이 정권과 정권을 떠받치는 보수세력의 뿌리 깊은 친재벌적, 친미 일변도 성향으로 미루어볼 때 충분히 예견된 사태였다.

  그러니까 촛불시위가 왜 시작되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이해력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들 자신은 선거 때에 비해서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데, 시민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촛불이 한창일 때 대통령이 사과 아닌 사과를 두번이나 한 것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지, 촛불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기회가 오자 즉시 전방위적인 탄압에 나섰고, 사실상 경찰국가체제의 수립에 열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정권은 더욱 고립을 자초하고, 고립 때문에 갈수록 더 포악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위험사상’

  그러나 물론 그러한 심리적인 고립의 문제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정권으로 하여금 다수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정권이 처음부터 숨김없이 드러내온 기득권 지향 정책기조이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기본적으로 이 나라의 뿌리 깊은 보수 기득권층이며, 이들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기 위해서 지금 정권이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 게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실은, 신자유주의는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계속되어온 정책 노선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역시 가장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것이다. 본래 신자유주의란, 간단히 말해서, 대기업과 금융자본 중심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모든 공적 규제와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시장 경쟁 시스템을 가장 철저히 관철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의 약육강식 논리이다.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자유로운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법률과 공적 규제의 철폐 혹은 완화를 요구하고, 국가에 의한 복지 서비스, 공익사업의 축소 내지는 폐지를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적, 문화적 가치를 오로지 금전적 가치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교육도, 의료도, 공공 서비스도, 문화적 활동도 오로지 영리(營利)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언제나 개인적 자유의 절대성이다. 그들은 제약 없는 무한경쟁을 통해서 개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되고, 따라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논리는 일본의 경제학자 나가타니 이와오(中谷巖)의 말이 아니더라도 심히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래 하버드대를 나와 오랫동안 일본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조언자로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권장해온 나가타니는 작년 가을 월스트리트의 금융파국을 보면서 이른바 ‘전향’을 한 끝에 최근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2009)라는 책을 써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개인단위로 세분화하여, 그 원자화된 한사람 한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안심, 안전, 신뢰, 평등, 연대 등 공동체적 가치에는 아무런 무게도 두지 않는다. 즉, 인간끼리의 사회적 유대는 이익추구라는 대의(大義) 앞에는 해체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위험사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사상’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삼는 한, 아무리 민주정부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여하한 사후적인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정책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책을 강구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결국 땜질처방에 불과할 뿐,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농촌공동체의 전면적 해체, 걷잡을 수 없는 환경파괴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며, 그것은 그대로 정치적 발언권에 있어서의 불평등의 심화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뿌리가 극히 허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 좀더 근본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집권세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토록 쉽게 민주주의가 허물어지게 된 까닭을 해명할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경제정책의 근본방향에 있어서 이명박 정권은 기본적으로 ‘민주정부’들의 계승자이다. 다만 이 정권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전 정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통치방식이 거칠고 일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권은 부유층과 대기업을 위한 온갖 특혜와 규제완화, 민영화를 거리낌 없이 추진하고, 토건업자들을 위하여 ‘4대 강 살리기’라는 얼토당토 않는 이름으로 미증유의 국토 유린 행위를 자행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일방적이고 무모한 정책들은 당연히 강한 사회적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는 도저히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비판세력 혹은 저항세력을 강권에 의해서 억압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이상, 이 나라가 경찰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의 대적(大敵)은 민주주의인 것이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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