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6호 2009년 5-6월호  인쇄용  

 

  언론의 위기, 벼랑 끝에 선 한국 민주주의

  안영춘

 

  붕어빵에는 붕어 비늘 하나 들어 있지 않고, 칼국수를 삼키더라도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일은 없다.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은 푸름의 가치(생태/평화/공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빨주노초파남보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은 색도(色度)의 관형어일 뿐이다. ‘녹색’이라는 관형어의 부채꼴 양쪽 끝은 아득히 멀다. 녹색과 민족주의 우생학이 만나면 인종대청소의 이데올로기인 나치의 ‘에코파시즘’이 태어나고, 녹색과 안전에 대한 이기적 집단욕망이 결합하면 공해산업 국외덤핑 같은 제1세계의 ‘에코임페리얼리즘’이 번창한다. 이들 둘의 공통점은 ‘독점’과 ‘배제’의 이데올로기에 ‘과학’의 (허구적) 논리가 동원돼 ‘물신주의’를 위장/은폐한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도 다르지 않다. 전국토를 개조하겠다는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 시절 남겨놓았던 땅까지 모조리 파헤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바꿔놓겠다는, 교묘하게 진화한 물신주의의 언술이다. 녹색의 관형어는 부박하고, 그 언어남용의 폐해는 무시무시하다.

  ‘녹색성장’의 탈을 쓴 언론장악 시도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드라이브가 한반도대운하 같은 공간 프로젝트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세혈관처럼 한국사회 구석구석에 뻗어 들어가고 있다. 정권 차원의 전방위적 드라이브가 애면글면 각종 계획의 이름으로 입안되고 있는데, 방송·통신계라고 해서 그 애꿎은 운명에서 비켜갈 수는 없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 KBS·MBC·SBS·KT·SKT·삼성전자·NHN·다음 대표 등 방송, 유무선 통신, 제조, 인터넷 업계 대표와 정부 유관기관 대표를 망라해 21명을 불러 모았다. 좀체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이 그날 최 위원장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는 이렇다. “우리 방송통신 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서비스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하여 각 분야의 녹색화를 가속화해나갈 경우 한층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녹색성장의 비젼을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민관협력기구인 ‘녹색방송통신추진협의회’가 발족했다. 방통위는 그 자리에서 2012년까지 모두 8,236억원이 들어가는 ‘녹색 방송통신추진종합계획(안)’을 발표했는데, 그 계획의 면면이 신묘하다. 이를테면 ‘방송·통신 융합서비스 사업’을 확대해 사람들의 물리적인 움직임을 최소화시킴으로써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식이다. 구체적으로는 IPTV나 디지털케이블TV를 통한 민원서비스·의료서비스 등을 보급하고, 영상전화 통화·회의 서비스를 확대하며, 이메일과 핸드폰 등을 통한 전자결제를 확산시킨다는 내용이다. 누가 봐도 ‘녹색’은 수사(修辭)일 뿐 통신대자본의 사업영역 확장이 본질이다. (통신대자본과 치열한 경합관계에 있는 지상파방송 쪽은 들러리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방향이 틀리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기기들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탄소배출량이 늘어날지 따위의 언급은 전혀 없다. ‘녹색’을 말하되 ‘성찰’이 없는 것이다. ‘녹색성장’에서 빠지지 않는 ‘일자리 창출’ 계획도 방송·통신 분야에서는 재밌는 구상으로 나타났다. ‘녹색교육’이라는 게 간판급 사업으로 걸렸다.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청정 인터넷’ 사용, 다시 말해 게임이나 음란물을 접촉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인력을 지원하는 일자리 창출 계획이란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게임이나 음란물을 접촉할 시간을 줄여주는 심야 사교육 인력을 지원하는 것도 녹색교육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웃고 말 문제가 아니다. 이런 ‘녹색 말장난’이 노골적인 언론장악 시도와 언론인 탄압, 나아가 미디어악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각종 미디어 관련법안 추진 등 거대하고 체계적인 기획으로 연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를 비롯해 언론 유관기관에 대통령 후보 특보 출신들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것이나 언론인들을 잇따라 체포·구속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과거 독재정권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목적이나 목표는 구개발주의와 신개발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확연하다. 과거에는 언론탄압이 비판적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소박한(?)’ 목적에서 시작되고 그 목적에 도달한 뒤 끝났다면, 지금은 훨씬 큰 구도 위에서 정치권력과 일부 신문권력, 자본권력이 손잡고 전일적이고 영구적인 언론지배를 목표로 터닦기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소유구조와 산업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기 위해 특정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먼저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선제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나는 끝까지 한 놈만 팬다”는 배우 유오성의 대사를 떠올려 보라.)

  〈PD수첩〉 공격을 통해서 노리는 것

  이명박 정권이 검찰은 물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까지 동원해 1년 동안 집요하게 MBC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그저 〈PD수첩〉과 〈뉴스데스크〉가 미워서만은 아니다. 수사책임자가 사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사표를 던진 PD수첩 명예훼손 고소 건을 수사부서를 바꾸고 결혼을 며칠 앞둔 예비신부를 체포하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강행하고 있는 것은, MBC에 대한 손보기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의 위축을 노린 경고메시지다. 미디어 관련법안 국회 처리(6월)와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진 교체(8월) 일정까지 내다본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MBC 경영진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뉴스 앵커를, 궁색한 이유를 둘러대며 거센 내부 반발과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교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거기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MBC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어디인지는 누구보다 이명박 정권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당장의 시청률·광고수주 저하가 아니다. 바로 경영진 교체, 나아가 소유구조의 개편이다. MBC 경영진은 이명박 정권이 보낸 메시지를 정확히 읽고 반응한 것이다. MBC가 공영방송의 틀을 유지하는 데는 MBC 지분의 70퍼센트를 가지고 있는 공익재단 방문진이 벼리 구실을 하고 있다. (나머지 30퍼센트는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과 ‘특수관계’에 있는 정수장학회 소유다.) 그러나 방문진은 역설적으로 정치권력이 MBC에 영향을 미치는 데 구동축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방송문화진흥회법에 따라 방문진은 MBC에 대한 관리감독권과 사장선임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 방문진 이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선임한다. 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은 여·야가 3대 2 비율로 선임한다. 지난해 정연주, 당시 KBS 사장 강제해임 과정을 떠올려 보라. 이명박 정권이 정 사장을 해임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장을 앉히는 과정에서 KBS 이사 선임권을 가진 방송통신위원회는 동력전달장치였고, KBS 이사회는 그 힘을 사장 강제해임이라는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구동축이었다. KBS가 사장 교체 뒤 곧바로 관제방송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는 8월 방문진 이사진 교체가 MBC에 미칠 파장을 미리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최악의 경우, 이명박 정권에 의해 장악된 새 방문진 이사회가 주식을 내놓고 최대주주 자격을 포기하는 ‘MBC 민영화’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4월 뉴스데스크 앵커 교체에 반발한 MBC 기자들의 뉴스제작 거부는 공영방송 MBC의 독립을 지켜내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런 사태 자체가 이명박 정권의 노림수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다. MBC 노조를 비롯한 내부 구성원들에게 현 사장은 최선은 아니지만 최소한 차악이다. 비록 외부의 압력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도 적극적으로 부역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경영진 퇴진을 요구할 경우 자칫 KBS처럼 최악의 사장이 들어올 수 있다. 기자들이 앵커 교체의 최종 결재권자인 사장 대신 보도본부장·보도국장의 퇴진을 요구했던 사정도, 앵커 철회를 관철하지 못한 채 뉴스제작 거부를 중단한 사정도 거기에 있다. 꽃놀이패를 쥔 정권 앞에서 경영진은 경영진대로, 노조는 노조대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은 것이다. 이처럼 MBC가 위축되고 난 다음을 6월 미디어 관련법안들이 대기하고 있다. 지금 언론계 안팎에서는 정권이 PD수첩 관련자 사법처리 → 총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한 최상재 위원장 등 언론노조 집행부 구속 → 미디어법 강행처리 → 방문진 이사진 교체와 MBC 장악 → 공영방송법 통과라는 시나리오에 맞춰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고 있다는 관측이 돌고 있다.

  ‘미디어법’이 통과된다면

  이런 시나리오의 최대분수령은 역시 미디어 관련법안의 운명이 갈리는 6월이다. 미디어 관련법안의 핵심쟁점은 크게 △신문·방송 겸영 허용 △방송에 대한 자본진입 규제완화 △사이버모욕죄 도입으로 정리된다.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극심한 진통 끝에 여·야 합의로 발족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도 이들 쟁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시도하고 있지만,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추천 위원들 다수가 논의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위원들에게는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를 무력화하기 위한 여당의 ‘알박기’인사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언론노조와 언론운동 진영은 신문·방송 겸영 허용에 대해서는 ‘조중동 방송 반대’로, 방송에 대한 자본진입 규제완화는 ‘재벌방송 반대’로, 사이버모욕죄 도입은 ‘인터넷 검열 반대’로 맞서고 있다. 이런 상징구호가 지난 12월 국회와 2월 국회에서 나름대로 효과를 발휘한 덕분인지, 조중동의 융단폭격식 엄호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관련법안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매우 부정적으로 나왔다. 이에 맞서 이명박 정권이 동원하는 프로파간다는 역시 ‘일자리 창출’이다. 한반도대운하 같은 토건 프로젝트, 재벌의 은행 지배를 노골화한 금산 분리 완화 등에서도 들고 나온 것처럼, ‘일자리 창출’은 이명박 정권에게 전가의 보도다. 지배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하는 프로파간다가 매양 ‘성장’과 ‘일자리 창출’이기는 하지만, 특히 이명박 정권에서는 세계 경제위기와 만나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기제가 되고 있다. 맹목적인 성장주의가 정작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임에도, 원인이 다시 처방으로 둔갑하는, 마약중독 같은 악순환의 고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붕어빵에 붕어 없고 칼국수에 칼 없듯이, 미디어 관련법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일자리가 창출되지는 않는다. 미디어 관련법안 개정으로 2조 9천억원의 생산유발효과와 2만1천명의 취업유발효과가 있다는 내용의 정책보고서를 작성했던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연구자조차 ‘방송사 앞에 있는 식당, 그 앞을 왔다갔다 하는 버스기사, 택시기사 고용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보고서는 그 뒤 전문가들에 의해 그 허구성이 낱낱이 폭로되었다. 조중동이 기존 방송사를 인수할 경우 인력 중복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오히려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들도 나왔다. 심지어 한나라당이 지배하고 있는 국회의 예산정책처도 이 보고서에 대해 ‘방송규제 완화로 인해 방송시장 규모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분석이 가지는 의미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실 장밋빛으로 채색된 생산유발효과와 취업유발효과는 방송·통신 분야에서는 이미 진부한 레퍼토리다. 역대정권은 케이블TV, 위성방송, DMB가 등장할 때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 ‘차세대 성장동력’이니 하며 떠들어댔지만, 매번 공수표로 끝났다. 1995년 케이블TV가 도입되자 삼성, 현대, 대우 등 거대재벌이 앞다퉈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곧 손을 털었다. 2002년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 출범 때는 무려 22조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13만명의 고용창출을 장담했지만, 2007년 현재 누적적자가 4,674억원인 상태다. 3조 4,000억원의 경제적 효과가 예상된다던 위성DMB는 같은 시기 누적적자가 2,998억원이고, 지상파 DMB도 적자 규모가 1,014억원에 이른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속임수

  이명박 정권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글로벌 스탠다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신문·방송 겸영과 거대자본의 방송 진출은 ‘세계적 추세’라는 얘기다. ‘미디어의 황제’라고 불리는 루퍼트 머독은 단골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한국에도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그룹처럼 초거대 미디어기업이 등장해야 세계적 추세에 뒤처지지 않고 미래의 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단다.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에게 머독은 미디어계의 ‘위인’이다. 그런데 머독이 누구이고 뉴스코퍼레이션그룹은 무엇인가? 머독이 폭력적으로 인수한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고유한 관점이 사라지고 획일화되었다. 이라크 침략전쟁이 발발했을 때, 머독이 소유한 전세계 백수십개 계열사 네트워크 가운데 이 전쟁을 비판한 매체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에서 자사 사주의 과거 친일행각이나 독재정권 부역행각을 제대로 인정하는 족벌 신문사가 한곳이라도 있던가. 중앙일보는 1960년대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2000년대 들어 불거진 삼성 X파일 사건에서도 중앙일보의 보도행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언론에 있어서 ‘소유’의 문제는 곧 ‘진실’의 문제이다. 미디어기업의 대형화가 미디어의 존재이유 자체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유다. 대기업 방송 진출과 함께, 이명박 정권이 말하는 미디어기업 대형화의 또다른 한축은 신문·방송 겸영 허용이다. 이명박 정권은 신문·방송 겸영이 세계적 추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또한 보편성이 없는 주장이다. 미디어기업의 인수합병이 가장 활발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도 신문·방송 겸영에 관한 한 실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신문·방송 겸영을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미국의 신문·방송 겸영에 대한 규정은 AM, FM, TV 모두 전파 도달 범위 안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교차소유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방송매체가 많은 상위 20개 DMA(전국을 210개로 나눈 미디어 구역)에서만 1개 신문과 1개 방송의 교차소유가 허용되고, 이것 또한 교차소유 이후에도 겸영하지 않는 방송이 8개 이상 남아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지역 내 상위 4개 방송에 대해서는 여전히 겸영을 금지하고 있고, 20위 아래 작은 DMA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교차소유를 허용하고 있다. 이에 견줘 이명박 정권의 신문·방송 겸영안은 신문에 대해 지상파의 20퍼센트, 종합편성·보도전문 PP(프로그램 제작사)의 49퍼센트 지분소유 제한기준만 있을 뿐 지역에 대한 제한이나 지분보유가 가능한 방송사 개수 등의 기준은 전혀 없다. 이명박 정권이 강조하는 ‘세계적 추세’는 시제조차 과거형이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신문·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하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의회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 의원 시절 연방통신위원장에게 항의편지를 보내는 등 신문·방송 겸영 완화 시도를 막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오바마가 2007년 말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보자. “소수자들이 소유하거나 운영하고 있는 신문들이나 라디오 방송국들은 아프리카와 라틴계 미국인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소수자 관련 문제들을 미국 사회 전체의 논의의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 위원회는 미디어 다양성이라는 목표를 실천하는 데 실패하고, 지역성을 구현하고 진작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귀 위원회는 (미디어)시장집중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침을 정당화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분명한 원칙을 가진 이가 미국의 새 대통령이다. 이명박 정권의 신문·방송 겸영 주장은 미국의 과거를 한국의 미래로 상정한 프로파간다일 뿐이며, 신자유주의 금융을 규제하려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움직임과 정반대로 금·산 분리를 완화하고 있는 행태와 정확히 닮은꼴이다. 이명박 정권은 언필칭 ‘미래’를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과거’를 숭앙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와 ‘미래’를 짝짓기하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규모’의 논리로 여론의 독과점을 획책하려는 시도는 종자를 획일화해 전지구적으로 독점화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초국적 곡물카르텔의 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곡물이 생산되면서도 8억명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극은 여론 시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초국적 곡물카르텔은 ‘오래된 미래’ 라다크 사람들의 농작마저 반강제로 획일화하고 있고, 그 피해와 위험은 지배세력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떠안고 있다. “지구의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문제의 핵심은 ‘분배의 정의’, 달리 말해 ‘민주주의’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이념을 넘어서 인류생존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다양성’의 거름 위에서 생장한다. 여론의 다양성 역시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인류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미디어정책이 방송사 노동자들의 ‘밥그릇 싸움’ 논쟁에 갇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밥그릇은 맞다. 그러나 방송사 노동자들만의 밥그릇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밥그릇인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언론탄압이나 미디어정책과 상관없이 미디어산업은 이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신문산업은 한두 기업을 빼면 고사를 걱정할 처지이고, 지상파 방송사들도 갈수록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탓만은 아니다. 지금 미디어업계가 겪고 있는 위기는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자본주의체제의 순환 사이클과 별개다. 미디어계 내부의 자체 변환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기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기술’이며, 미디어 내부의 변환은 기술진화의 필연적 산물이다. 미디어의 역사는 기술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금속활자와 윤전기가 신문의 시대를 열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시대는 모르스 전신부호에서 출발했다. 근대 자본주의 산업혁명이 증기기관과 방적기의 발명에 기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디어에 있어서 최신의 기술진화는 디지털정보통신기술의 등장이다. 그러나 라디오가 신문을, 텔레비전이 신문과 라디오를 위협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디지털정보통신기술은 기존 미디어들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거대한 변환’이다. 과거의 기술진화가 근대의 울타리 안에서 이뤄진 것인 데 견줘 디지털정보통신기술은 탈근대를 촉발했다.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은 ‘전달’의 방식뿐 아니라 ‘소통’의 개념까지 바꿔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독점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은 전달수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방향성에 머물렀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역할이 정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그 역할이 뒤바뀌는 일도 없었다. 또한 이들 미디어는 거대한 장치산업이어서 정치권력의 허가제뿐 아니라 자본력 자체가 진입장벽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정보통신기술,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인터넷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디지털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상당수 사업모델은 거대자본이 있어야 가능하다.) 컴퓨터와 인터넷선만 있으면 누구라도 공론의 장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촛불정국에서 활약했던 1인 미디어들은 현장성과 속도에서 기존 미디어를 압도했다. 미디어의 힘은 여론형성을 통해 완성된다. 일방향 커뮤니케이션만 가능하던 시절에는 정보·의견을 전달해도 여론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정확히 측정할 수단이 충분하지 않았다. 미디어(공급자)에 의한 표현과 전달 자체가 곧 (수용자의) 여론으로 상징화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작용, 이를 통해 검증된 정보와 의견, 새롭게 형성된 집단적인 메시지라야 여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누구라도 정보를 전달하고 논평할 수 있는 시대에 기존 미디어는 더는 독과점적 지위를 누릴 수 없고, 여론의 장에서 만인과 경합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변화가 산업적 측면에서 기존 미디어의 경영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돌출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과연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일까?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은 처음부터 나뉘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악이 갈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태친화적 삶을 확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기술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면 이런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량 살상무기의 원천기술은 어떤가? 특히 원자력은? 선악은 기술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사용자 내부에 있는가? 이 물음은 여기서 답하기에 너무 복잡하고 거대한 것 같아 논의를 더 밀고 나가지 않겠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민주적인 기술(반민주적인 기술이 아닌)과 더 민주적인 기술은 쉽게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량 인쇄기술과 전파기술 등 일방향성 기술은 인터넷 같은 쌍방향적, 상호작용적 기술보다는 확실히 덜 민주적이다. 이런 사유들은 미디어의 위기를 논하는 상황에서 다소 한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명박 정권의 미디어정책을 평가하는 데는 결정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이명박 정권이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또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이 얼마나 민주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지 따져보는 일은 기존 미디어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태도를 살펴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녹색 방송·통신 추진 종합계획에서 지상파방송보다는 통신 쪽에 기울어 있다. 이런 태도는 정권 출범 이후 방송과 통신의 융합 지점에서 일관되게 통신자본 쪽에 유리한 정책을 펴온 데서도 확인된다. 이명박 정권의 방송·통신 정책이 철저히 산업적 관점에서 수립되고 있어서이기도 하거니와, 기존 지상파방송의 위상을 통신의 하위에 둠으로써 방송을 욕보이고 길들이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최근에는 방송사들의 콘텐츠를 통신 대자본이 운영하는 IPTV에 공짜로 넘겨야 한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어쨌든 디지털정보통신기술에 의해 열린 방송·통신 융합 분야를 KT나 SKT 같은 통신대자본(누구)에게 넘겨, 자본재생산을 극대화하는 데(어떻게) 활용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새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일지라도 주체와 목적에 의해 기술의 성격이 갈린다는 걸 입증한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대로라면 방송과 통신이 융합한 미래 제3의 방송에서 ‘언론’의 본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길들이기

  오는 6월 강행처리될 가능성이 높은 미디어 관련법안 가운데 하나인 ‘사이버모욕죄’에도 이런 사유를 적용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이버모욕죄는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 여권에서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 죄목은, 간단히 말하면 인터넷에서 의견표명행위를 검열해 그 의견이 타인에게 모욕적인지 아닌지 가리고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모욕죄 자체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큼 사례가 드문 과잉입법으로 이미 비판받고 있다. 더구나 사이버모욕죄는 단순히 모욕죄를 사이버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죄는 ‘반의사 불벌죄’다. 반의사 불벌죄란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가 없어도 국가가 나서서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죄를 말한다. (다만 당사자가 이 사실을 알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히면 처벌하지 않을 수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가 있어야 수사를 시작할 수 있는 ‘친고죄’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인터넷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가 없어도 국가가 나서서 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모욕’이란 개인의 감정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국가가 대신 모욕을 느껴주겠다는 얘기다. 이거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준다는 텔레비전 개그프로그램의 ‘도움상회’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명박 정권이 무리한 입법을 추진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인터넷에서 아예 정권비판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민주적인 기술인 인터넷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다. 세계적인 조롱을 산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사태를 상기해 보라. (로이터는 미네르바 구속을 다룬 기사를 ‘Oddly enough’라는 분류 항목에 배치했다. 의역하면 ‘황당뉴스’, 즉 ‘사람이 개를 문 사건’쯤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자체를 죄와 동일시한다. 얼마 전 세계적 포털기업 구글은 자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코리아’의 사용자가 ‘한국’으로 국가 설정을 하면 동영상과 댓글을 올릴 수 없도록 해 화제가 됐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8월 인터넷실명제 적용대상을 하루 10만명 이상 방문자 사이트로 확대해 올 4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자 이에 맞춰 취한 조처다. 구글은 이 조처와 함께 “평소 구글이 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우선되어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역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조롱으로 읽히고 있다.

  ‘미디어 생태계’파괴 이후, 우리의 삶은?

  그러나 조롱만 하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엄혹하다. 이명박 정권의 공세는 크고 거세다. 위기의식을 파는 교묘함에 대응하기도 벅찬데, 공세는 뱃머리를 때리는 대양의 파도처럼 끝없고, 배 밑전에서도 치솟는 바닷물처럼 전방위적이다. 공권력과 자본을 통해 전일적이고 영구적인 언론지배 시나리오를 획책하고 있는 모습은 빤히 보이지만, 자칫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멀리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쓰나미는 오는 6월 미디어 관련법안 강행처리 시점에 맞춰 우루루 내달려오고 있다. 더구나 미디어계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는 한국사회 절대다수가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일부, n분의 1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미디어부문의 위기를 위기의 일부가 아닌 위기의 출발 또는 총화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미디어 생태계’ 파괴 이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지금도 변변찮은 우리의 발언무대가 완전히 사리지고 나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내 삶에는 어떤 상황으로 들이닥칠지 상상해보는 거다. 온 나라 물길을 개조하려는 한반도대운하 음모에도, 부자 감세 부작용을 경기부양의 거짓 구호로 덮으려는 눈속임 추경예산에도, 물이고 전기고 모든 공공영역을 사영화하려는 기획에도, 이 사회의 모든 젊은이들을 체제의 국외자로 내몰면서 애면글면 일자리 나누기를 핑계로 사회총임금마저 삭감하려는 탐욕에도, 아니 우리 아이들이 불공정한 출발점에 서서 줄서기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공교육말살 기도에도 찬양의 소리만 높을 뿐 비판의 소리는 어디서도 한줄 새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역전의 전기는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에 대한 장악이 완성되고 나면 우리에겐 매트릭스의 완벽한 감시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빅브라더 한 사람뿐이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미디어 관련법안 저지에 함께 나서야 하는 이유다. 거기가 끝은 아니다. 우리는 미디어 관련법안 저지 이후까지 내다보며 싸워야 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론의 자유를 꿈꾸는 일 말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등하게 소통하는 새로운 미디어 생태질서의 꿈 …. 그런 꿈에 다가갈 때라야 제 무게에 겨워 위기에 처한 기존의 주류미디어와 아직 온전한 꼴을 갖추지 못한 신생미디어가 상생하며 공존할 수 있다. 이 싸움은 그 꿈을 그리고 실천해가는 출발점이다.


  안영춘 ― <미디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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