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4호 2009년 1-2월호  인쇄용  

 

  자급의 지혜

  데이비드 보일

 

  70년 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그가 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무시되어온 텍스트〈국가적 자급자족〉을 발표했다. 이 강연은 현대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별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 케인즈를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불편하게 여겨, 카페트 밑으로 치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강연은 그 당시처럼 극적으로, 또 고무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지금 반세계화 진영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는 케인즈의 유일한 구절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 간의 경제적인 얼크러짐을 최대화하려는 이들보다는 최소화하려는 이들에게 공감한다. 사상, 지식, 예술, 환대, 여행―이러한 것은 그 본성상 국제적이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편의적으로 가능한 경우에는 재화는 모두 국내에서 자급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융은 기본적으로 국가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진술이다. 케인즈는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화―즉, 돈이 삶보다 우위를 점하는―를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그의 강연의 나머지 잊혀진 부분도 긴급하게 되살려 다시 연구될 가치가 있다. “한 나라가 농업을 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여유’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그는 그 강연에서 말했다. “예술이나 발명, 농업이나 전통을 자급해내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식품재벌의 독점 앞에서 쇠퇴일로에 있는 영국 농업의 현실에 비추어 이것은 극적인 중요성을 갖는 말이다.

  케인즈는《재생(Resurgence)》과 같은 잡지의 지면에서 칭송을 받을 인물은 분명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국민총생산(GNP)이라는 개념의 창시자이다. 국민총생산이라는 개념은 화폐가치를 가진 것들만이 중요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인간과 지구에 말할 수 없는 해를 끼쳐왔다. 비록 그가 마련한 원래의 설계가 미국인들에 의해 거부되기는 했지만, 그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창시자이다. 또한 그는 물론 현재 케인즈 경제학이라고 알려진 것의 창안자이다. 즉, 차금(借金)과 소비를 통해서 침체된 경제를 빨리 활성화시키고, 그 결과 인플레와 무제한적인 성장과 소비사회를 출현시켜온 경제학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경제학의 거짓말―즉,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든 경제학 속에 포섭될 수 있다는―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경제의 문제를 인간의 돈에 대한 치명적인 사랑에 근거한 도덕적 위기의 문제로 보았다. “이 세대의 마음은 여전히 엉터리 계산에 의해 너무나 혼탁해져 있는 탓에, 그들은 ‘수익성’ 여부를 따지는 재무회계 시스템에 매달려 자명한 결론을 믿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파괴적인 회계 규칙이 삶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이용되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경제적인’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시골의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우리는 해와 별들이 이익배당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와 별들을 차단시켜버리려고 할지 모른다….”

  “그리고 또, 최근까지 우리는, 만약 한 조각 빵을 10분의 1페니라도 싸게 살 수 있다면, 땅을 돌보는 농부를 망하게 하고, 농경에 관련된 오랜 인간적 전통을 파괴하는 것을 우리의 도덕적 의무로 생각해왔다.”

  “이러한 탐욕의 신―몰렉과 마몬이 결합된―을 위하여 희생시키는 게 우리의 임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괴물에 대한 경배가 가난이라는 악을 극복하고, 우리 다음 세대를, 복리(複利)의 등에 태워, 경제적 평화 속으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데리고 갈 것이라고 충성스럽게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거기에 대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 강연의 논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것은 무역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또한 이것은 사치품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대도 아니고, 외국인이 두렵다는 이유로 민족주의적인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또한 금융시스템을 폐기하자는 탄원도 아니다. 케인즈는 조급함과 불관용성의 위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케인즈의 이 강연은 랍비 마이클 러너가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척도’라고 부르는 것을 제창하고 있다. 화폐에 대한 그의 전문지식과 그가 느낀 매혹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회적 척도는 결코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과 문화와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제창하는 것은 ‘회계상의 이윤을 재는 테스트에 불복종’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산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구를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가 경이로운 삶터가 될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나는 바로 이것이 케인즈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가 뜻한 바였다고 믿는다. “만약 오늘 내게 힘이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우리의 대도시들을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명을 갖춘 도시로 만드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내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누릴 여유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뒤집혀진’ 경제학에 관한 비젼이다. 사람이 돈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돈이 사람에게 봉사하도록 고쳐진 경제학 말이다.

  케인즈는 62세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전 몇해 동안 그는 젊은 경제학자 E.F.슈마허와 교신하고 있었다. 슈마허의 책《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나오기 30년 전이었다. 케인즈는 슈마허에게서, 마술사가 동료 마술사를 알아보듯이,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았다. 그는 한 친구에게 말했다. “만약 내 외투를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오토 클라크이거나 프리츠 슈마허일 것이다. 클라크는 수치를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마허는 그것들이 노래하도록 만들 수 있다.” (김정현 옮김)


  데이비드 보일(David Boyle) ― 영국 런던에 있는 New Economics Foundation 소속 연구원. 이 글의 원문은 Resurgence 219호(2003년 7-8월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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