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02호 2008년 9-10월호  인쇄용  

 

  당신들의 법, 우리들의 정의

  합법적 불법과 불법적 정의

  박경미

 

  올바름에 대한 감각

  입추하고도 말복, 처서가 지났으니 여름은 다 갔다.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던 더위도 갔다. 넓고 환하다는 데 혹해서 지붕 밑 다락방으로 연구실을 옮긴 탓에 올여름 더위를 톡톡히 겪었다. 지붕 밑층으로 올라서기가 무섭게 더운 기운이 훅 끼쳐오고, 용량이 적은 에어컨은 별무소용이었다. 한 일주일은 정말 고생했다. 그러나 그 맹렬했던 여름도 갔고, 뜨거웠던 촛불의 열기도 식었다.

  10년쯤 지나서 우리는 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역사에는 왜 이렇게 낭비가 많은 걸까? 우리 근현대사가 온통 그랬다. 동학혁명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좌절됐고, 나름대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 애쓰다가 일본에 합병됐다. 해방됐나 했더니 남북이 분단되어 동포끼리 참혹한 살육전을 벌였고, 4?19를 통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나 했더니 5?16이 일어나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80년 민주화의 봄은 12?12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고, 87년 민주대항쟁은 독점자본과 관료의 지배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역사는 갈지자로 걷는 모양이다. 역사의 이 갈지자 걸음에 촛불도 밟히고 마는 건가? 그러고 보면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해방의 경험 뒤에도 ‘광야 40년’이 기다리고 있었고, 모세를 비롯해 출애굽 1세대는 단 한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니, 촛불도 ‘광야 40년’을 겪어야 할 모양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나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지 역사의 수레바퀴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아서 그냥 굴러간다. 세속사에서 구원사를 읽어내는 것은 본래 기독교인들의 습성이지만, 구원사나 섭리라는 말은 우리끼리 고백하고 위로할 때 할 수 있는 말이지 아무 때나 써먹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문맥을 벗어나면 그런 말들은 하느님을 내세워 자기를 정당화하는 폭력으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우스꽝스러워진다. 이 점에서 역사의 잔인한 측면과 가감없이 대면하는 인도 종교는 훨씬 냉철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힌두교의 칼리 여신상은 양쪽에 네개의 팔을 가졌는데, 한쪽 팔로는 피묻은 칼과 참혹하게 잘린 인두(人頭)의 머리칼을 거머쥐고, 다른 쪽 팔로는 은혜를 나누어준다. 여신은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가는 형상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피가 낭자한 ‘검은 칼리’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자들의 위축된 심리상태가 투사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이미지를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의 내면이 어떠할지 상상해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끊임없이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유지된다. 이 여신의 이미지는 끝없이 반복되는 파괴와 생성의 우주적 공정 안에서 선과 악, 주관과 객관, 나와 너의 온갖 대립과 모순을 무화시키면서 존재하는 영겁회귀의 우주적 전체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아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들에게는 삶도, 역사도 발전이 아니라 반복이다.

  이런 인식을 향해 열려 있는 자아라면 삶과 역사에 대한 이기적이고 감상주의적인 태도에 덜 빠지지 않을까? 흔히 과거를 돌아보며, 그래도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고 말들 한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옛날보다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진리이려면 먼 훗날 그의 아이도, 지구의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얼굴을 모르는 그의 이웃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일 뿐, 진리가 아니다.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환상을 걷어내고 역사를 들여다볼 때 ‘진보에 대한 희망’ 대신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얼 배울 수 있나?

  개체로서 나라는 한 인간의 삶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나라는 한 개인의 삶은 좀더 안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어쩌면 좀 덜 외롭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데에 골몰하는 것은 자기탐닉이고 자기연민일 뿐,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신비한 생명의 영속성과 연대를 통해 삶이 은혜로 지금 나에게 주어졌고, 생명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리라는 사실이다. 지나간 삶의 행렬들은 이 점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명의 영속성과 연대성, 자발성에 봉사하는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파괴되는 것들에 대한 연민. 욕심과 허영심을 걷어내고 역사와 마주하면 아마 역사에서 우리는 그런 감수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역사로부터 그런 감각을 체득하고 덤으로 인생에 대해 만족하는 법까지 배울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이명박 정권의 실상과 본질

  촛불이 약해진 것은 자연스럽다. 날도 너무 덥고, 또 먹고살아야 하니까. 달리기도 쉬어가며 해야 한다. 무려 석 달을 기적같이 촛불이 이어졌고, 소수지만 지금도 촛불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약해졌지만 촛불은 등경 위에 올린 등불처럼 숨겨둔 것을 드러내고 감추어둔 것이 환히 알려지게 만들었다. 물리적인 힘을 가진 정권으로부터 촛불이 실제로 얻어낸 것은 없지만, 촛불이 사람들에게 환히 알려준 것이 있다. 촛불은 이명박의 실상을 보여주었고, 이명박은 이제 본색을 드러냈다. 촛불이 아니었으면 이명박이 이처럼 빨리 그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대선과정에서부터 국민들은 이명박의 도덕성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접고 들어갔다. 뻔뻔스런 거짓말쟁이에다 도무지 품격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경제만은 살리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도덕성은 없어도 실력은 있겠지 하는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광우병 파동을 통해 드러난 것은 바로 그 실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협상과정의 내막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이 정권이 최소한으로라도 국민건강권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협상실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렇게 강조했던 영어실력마저 없었다.

  실력이 없다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실상이라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 촛불을 통해 드러난 이명박 정권의 본색이다. 이 정권의 지난 6개월이란 촛불의 파도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헤어나오려는 몸부림이 전부였다. 촛불이 거세지자 이명박은 두번 사과했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자기 말대로 “비가 오니 처마밑에 잠시 비를 피한 것일 뿐” 비 긋자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사과도, 약속도 쉽게 하지만, 말을 뒤집기도 쉽게 한다. 공기업 선진화 사업이 공기업 민영화 포기 약속에 대한 말뒤집기라면, 4대강 유역 정비사업은 한반도 대운하 포기 약속에 대한 말뒤집기다. 나아가 언론장악과 인터넷 통제는 힘 가진 자의 주먹휘두르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언론만 장악하면 지지율이 올라가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렴 바퀴벌레도 그 정도 머리는 굴려가며 산다.

  더위와 생계에 지치고 올림픽에 취해 있는 것 같아도 촛불들은 지금 이명박 정부가 하는 일을 빤히 다 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정권의 747 공약(公約)이 실현 불가능한 공약(空約)임을 진즉에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 정권이 내세우는 허울좋은 정책들이 대다수 서민들을 벼랑끝으로 몰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대의민주주의란 삼성과 조선일보, 한나라당이 한패가 돼서 벌이는 과두지배체제를 가리기 위한 위장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달아가고 있다. ‘선진화’니 ‘녹색성장’이니 하는 경제성장에 대한 약속이 결국은 자신들의 삶을 결딴내고 말리라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촛불은 꺼졌다 켜졌다 하겠지만, 깨어난 민중의 자각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촛불은 꺼진 게 아니라 횃불이 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러므로 촛불시위 전과 후 우리사회의 정치와 문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고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지지율 20퍼센트에 자신감을 얻고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확신을 얻은 이 정권은 지지율 30퍼센트에 드디어 기고만장했다. 한나라당에 제정신 가진 사람이 그래도 좀 있다면 촛불들보다 오히려 그들이 더 가슴 졸이며 이 정권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국민은 알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알아버린다. 노무현 정권은 그 태생부터 헷갈리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거의 자기파괴적인 경지에 이를 정도로 탈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여주었고, ‘진보의 수사학’을 구사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편’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정권은 속을 다 드러내고 공안정국을 조성할 뿐 아니라 파시즘적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믿던 경제도 발등 찍고 있는 중인데. 덕분에 국민들이 아주 똑똑해지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은 이 나라가 ‘고소영’, ‘강부자’로 대변되는 ‘당신들’과 거기 끼지 못하는 ‘우리들’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애초에 세상이 그리 되어있다는 것쯤 알고는 있었지만, 당신들과 우리들 사이에 원래 있던 ‘저 바다’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바다이고, 이제 그 바다에서 쓰나미가 일어 우리를 덮치려 한다는 것을 이 정권의 정책과 인사를 통해 확실히 알아가고 있다. 아직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싶어서 모르는 것이고, 알 사람은 다 안다. 촛불이 사람들을 똑똑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국민을 깔본다. 헷갈리게 안하는 게 미덕이다 보니 불문곡직 ‘법의 주먹’을 들이댄다. 결국은 법이다. 경제에도, 정치에도 실력이 없으니 내세우느니 ‘법의 폭력’이다. 법을 제멋대로 해석해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합법이고 불리하면 불법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 경찰, 감사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이 이명박 일개인의 정치도구화됐을 뿐만 아니라, 헌법의 기본정신과 민주주의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언어가 훼손됐다. 임기가 남은 공영방송 사장을 내쫓고 자기 측근을 사장자리에 앉혀 놓고는 그걸 ‘방송정상화’라고 부른다.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합법’이고, 헌법이 보장한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법치’다. 다른 모든 탈법행위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언어혼란’의 죄 하나만으로도 100년쯤 감옥을 살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혼란’은 아이들 교육에 정말 안 좋기 때문이다.

  촛불시위 때 시민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헌법 1조’였다. 경찰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 부르는 시민들을 방패와 물대포를 동원해 연행했다. 이 장면만큼 이 정권이 헌법을 모욕하고 국민을 능멸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우리는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 인선과정에서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불법을 일삼는 자들임을 보았다. 그리고 삼성특검과 재판결과를 통해 법이 얼마나 가진자들 편에 유리하게 적용되는지 보았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할 만큼, 범죄적 행위를 한 당사자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언과 정황을 확보하고도 최소한의 진실규명마저 외면당하는 것을 보면서 ‘삼성’이라는 금권과 관권, 언론과 법조계가 같이 손잡고 돌리는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한지 절감했다. 법을 능멸하고 짓밟으며 구겨진 종잇조각으로 만든 것은 그들 자신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른다. ‘당신들의’ 합법은 우리들의 법감정으로 보면 불법이고, ‘우리가’ 갈구하는 정의는 ‘당신들이’ 펼쳐놓은 법망에서 보면 불법이다. ‘당신들의’ 합법도 불법이고, ‘우리들의’ 정의도 불법이다. 결국 법도 정의도 불법인 불행한 상황에 우리는 처해 있다. ‘당신들’과 ‘우리들’ 사이의 이런 조잡한 이분법을 거론하는 것이 영 불편하지만, 지금 현실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정의와 평등

  돌이켜보면 불의한 ‘법의 지배’ 상황은 법이 존재한 이후 늘 있어왔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서구에서도 법과 도덕 사이에, 법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실정법과 자연법 사이에 긴장과 갈등은 늘 있어왔다. 그러므로 자연법의 이름으로 실정법에 도전하고, 정의롭지 못한 ‘법의 지배’에 저항해온 역사와 전통 역시 유구하다. 그런데 근대 법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법과 도덕의 긴장 문제가 실정법 내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왜냐하면 오늘날 헌법이야말로 인권이나 자유, 평등 같은 도덕적 가치를 근대 자연법의 도덕적 원리로 수렴해서 제도화, 실정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정부라도 불법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해야 하지만, 통치권자 역시 헌법의 정신에 귀의함으로써 통치행위의 도덕적 정당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때 헌법은 정치가 도덕과 소통할 수 있게 도덕적 가치를 법적 언어로 실어나르는 수레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정치나 법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색맹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촛불시위 때 사람들이 ‘헌법 1조’를 그렇게 목청껏 불렀던 것도 아마 거의 본능적으로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브르흐는 결코 법이라고 할 수 없는 법이 인간을 말살하고, 사소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까지 사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정의를 추구하려 애쓰는 법만이 법일 수 있다고 했으며,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 관해 말했다. 법률을 초월한 법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초법률적 법의 최소한의 내용을 ‘인권’이라고 보았다. 인권을 국가 이전의 권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칸트에 근거해서 이러한 인간성의 원리를 “비인간적 잔인성에 맞서는 인간의 우정, 비인간적 굴욕에 맞서는 인간의 존엄, 비인간적 문화파괴에 맞서는 인간의 형성, 즉 교육”이라고 천명한다(라드브르흐《법철학입문》육법사, 205쪽).

  ‘초법률적 법’의 최소한의 내용으로 인권을 이야기했다면, 그는 정의가 조금도 추구되지 않거나 정의의 핵을 이루는 평등이 거부되는 경우는 법으로서의 본질을 결여한 것이라고 했다. 평등의 결여가 ‘법률적 불법’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법과 계급의 문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법체계는 실제로는 강자를 강하게 하고 약자를 약하게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법이 사회적 강자와 약자를 법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면, 평균적 정의에 입각한 절대적 평등은 실현되지만 배분적 정의에 입각한 비례적 평등은 실현되지 못한다. 즉 법의 상대적 불평등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라드브르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법은, 정의의 본질에 대립되는 것, 즉 불법이라고 본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불평등한 법은 불법이라는 것이다(라드브르흐, 210~216쪽).

  라드브르흐가 말하는 법적용의 상대적 불평등은 특히 노동문제에서 심각하게 나타난다. 가령 ‘기륭전자’의 경우, 파견직 노동자는 끔찍한 저임금과 해고의 불안에 시달리지만 기업가는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벌금 500만원 내고 도리어 정규직마저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법을 악용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과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기업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결코 평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직접고용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는 노동자가 “목숨 걸면서 왜 이렇게 싸우는지 해고를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노예가 돼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한 말은 절박하게 다가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과 기업이 지불하는 노동의 대가는 화폐라는 단일한 가치를 통해 환산된다. 그러나 기업에게 임금이 돈일 뿐이라면 노동자에게 노동은 그 자신이다. 맑스가 말했듯이 노동은 다른 재화와 똑같은 재화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결국 가진자의 ‘소유의 자유’는 물건에 대한 처분의 자유를 넘어 인간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가 된다. 노동수단을 지배하는 사람은 노동자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갖게 되고, 자유와 평등의 허울 아래 실제로는 종속적이고 불평등한 관계가 생겨난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에서 법은 실질적으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공산주의 선언》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37쪽)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맑스의 이상은 법의 평등한 실현을 위해 여전히 유효하다. 법은 모든 인간적 관계에서 실질적인 평등의 실현에 봉사해야 한다. 이 점에서 법의 정신의 실현은 민주주의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법의 기본정신은 ‘정의’이고, 정의의 실질적인 내용은 ‘평등’이다. 이것은 법이라는 말 안에 이미 들어있다. 법을 뜻하는 라틴어 ius는 정의를 뜻하는 iustitia에서 유래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원형으로서 “일반적이고 비례적인 평등”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반적인 평등이면서 동시에 개인들 사이의 자연적 차이를 균등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평등한 인간됨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과 정의의 이념이 실제로 지켜졌느냐는 별문제다.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 다함께 바라볼 드높은 이념을 소유하고, 그 이념의 무게와 부담을 느꼈느냐는 것이다.

  한자에서도 法이라는 말은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法이라는 한자는 축약된 것이고, 원래는 去자 밑, 또는 위에 ‘외뿔양’을 뜻하는 ?(치)자가 있었다고 한다. 신화적 동물인 이 외뿔양은 마을에 정의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뿔로 받아서 마을 밖으로 제거[去]한다고 믿어졌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水자는 물의 평평해지는 성질, 물이 언제나 아래로 흘러서 평평해지는 평등의 성격을 나타낸다. 악행을 일삼는 자를 추방해서 정의를 이루고, 바닥으로 내려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법정신의 핵심임을 이 글자는 말해준다. 중국문화권에서도 정의와 평등은 법정신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사회도 이제는 정권 자체를 불법정권으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권 역시 국민이 선거를 통해 탄생시킨 합법정권이다. 그럼에도 이 정권 들어 정치권력의 불법행위를 폭로하고 저항하는 일이 잦아지고 또 거세지고 있다. 아마 계속 그럴 것이다. 이와 함께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와 사회적 권리에 대한 분쟁도 점점더 재판의 형식을 빌려 해결되고 있다. 시민단체의 불복종운동이나 국민적 저항마저도 ‘합법적 불법’에 의한 탄압에 맞서 법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저항의 문제가 재판의 형태로 귀결되고, 실질적인 불평등 상황에서 결국은 지는 게임에 말려들고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정권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행위가 정치적?민주적 의사형성의 한 과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범죄행위가 될 것인가는 법규정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 법을 해석하는 정치문화와 사회적 교양의 수준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사회의 교양의 수준을 담보해야 할 언론과 대학과 종교, 특히 보수 개신교를 생각하면 절망적인 생각이 든다. 교회를 아껴서라기보다 아직도 교회를 아끼고 교회 안에서 애쓰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함부로 말 못한다. 그러나 차라리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게 낫겠다는 성마른 생각이 자꾸 든다. 한국 교회, 정말 이러면 안된다.

 

  “뭇 왕조가 사라져도”

  지난 대선과정에서 보수 대형교회들은 조직적으로 이명박의 당선을 위해 움직였다. 강인철 교수는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개신교에서 얻은 표를 최소한 300만표 이상이라고 보았다. 이 수치가 전체 득표에서 차지한 비율은 25퍼센트 이상으로 당락을 가를 만한 변수였다. 개신교 보수세력과 이 정권과의 결탁은 ‘고소영’, ‘강부자’라는 신조어에서 드러나듯 이명박=개신교=부패라는 연속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기왕에 있던 계급간, 지역간 갈등 외에 종교간의 갈등을 첨예하게 부각시켰다. 이 갈등의 전선은 개신교 내의 주류와 비주류, 보수 개신교와 불교 사이만이 아니라, 교회와 시민사회 사이에까지 형성되어서 개신교 전반에 대한 한국사회의 부정적 이미지는 극에 달했다.

 종교가 정치나 사회에 관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공동선을 위해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것도 종교의 정치참여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이익을 위해 대사회적 행동을 하는 것도 종교의 정치참여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기존체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야합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류 개신교 집단은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치행위에 열을 올리면서 자기들은 꿈에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의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저항운동에 대해서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기염을 토한다. 교회만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정치행위는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반면,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이타적인 정치행위는 정치적이고 비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제 밥그릇 챙기는 것은 복음적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비복음적이라니, 이들이 기다린다는 재림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시면 얼마나 기막혀 하실까?

  종교가 대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은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이다. 이것을 보통말로 풀면, 사회적 상황이 내포하는 도덕적 함의를 첨예하게 부각시켜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도덕적 민감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 언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불가피하게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을 구분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정죄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하기 힘든 일이면서 동시에 요청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일은 아무나 못한다. 제 밥그릇 챙기는 일 따위에나 열을 올리는 종교집단은 절대 진정한 의미의 정치참여를 할 수 없다.

  예수는 자기 시대의 합법화된 불법에 저항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은 그 시대의 법담당자들이었고, ‘합법적 불법’을 자행하는 자들이었다. 마태복음 23장은 온통 당대의 법담당자들을 향해 예수가 퍼붓는 독설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오죽하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라고 말했겠는가! 자기 시대의 ‘합법적 불법’과 싸웠던 예수는 역설적이게도 법 자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이기도 했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 6:48; 레위 19:2)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이웃사랑의 계명이었다.(마태 19:21) 결국 법을 두고 벌였던 예수의 싸움은 신적 품성을 닦아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돈이나 권력 같은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기 이전 왜곡되지 않은 인간다움의 원형으로서 선한 품성, 서로 돕는 평등한 공동체적 인간성에 대한 순결한 이상과 관련된다.  

  돌아가시기 전 병석의 함석헌 선생을 찾았던 사람들은 “바울이 쪽박 차고 다니며 전도한 기독교가 어쩌다 이리 됐나” 탄식하면서 벽을 두드리며 우시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고 한다. 바울은 하느님은 차별없이 사람을 대한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갈라 2:6)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28) 이런 말은 언제 들어도 청명하고 감격스럽다. 바울이 말하는 하느님의 평등주의는 철두철미하며 준엄하다. 하느님은 누구나 차별없이 받아주지만,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선을 요구한다.(로마 2:10-11)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신앙도 사실은 이러한 평등의 신앙이다. 하느님 앞에 설 때는 누구나 빈손으로 서야 한다.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특권이나 자랑거리는 아무 소용없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내려놓을 것도 많다. 그러니 아무 특권도, 자랑거리도 없던 사람들이 이 소식에 가슴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유대 율법과 관련한 바울의 싸움은 사실은 법적 평등을 위한 싸움이었다. 바울도 예수와 마찬가지로 평등의 실현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가슴에 새겨둘 대목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삶 자체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다. 이 물신의 시대에 법은 불의가 되고 정의는 불법이 되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감수성과 법감정을 권위적인 명령에 희생시키고 그저 무엇이 법이고 명령인지 알고자 할 일이지, 결코 그것의 정당성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직업적 의무 내지는 직업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더욱이 이명박 시대에 보수 개신교집단과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하고 노예적 인간을 양산할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 어이없는 시대에 대학과 언론, 교회는 저항과 비판의 보루이기를 그쳤다. 어디든 제도에 속한 전문가들은 세상이 복잡하다는 점을 자꾸 강조한다. 그러나 정당성의 세계는 매우 단순한 세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영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일 우리가 도덕적 이상과 우리 자신의 부족한 실천 사이의 간격을 심리적으로 잘 감내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있다면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토마스 하디는 이 단순성의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1

  오로지 사람 하나 느린 걸음으로
  말없이 그저 흙을 갈아엎을 뿐,
  늙은 말은 연신 비틀거리며 끄덕이며
  졸음에 겨운 듯 무겁게 움직이고.

  2

  오로지 엷은 연기 한 줄기 불꽃도 없이
  덩굴풀 더미에 피어날 뿐,
  그러나 뭇 왕조가 사라져도
  이것은 변함없이 이어지리라.

  3

  처녀 하나와 그의 총각
  저어기 속삭이며 지나간다.
  전쟁의 연대기가 구름 되고 밤 되어도
  그들의 이야기는 그치지 않으리라.
―〈‘뭇 나라의 괴멸’이 오는 시대에〉(김길중 옮김)

 

  전쟁이 일어나 민족들이 흩어지고 국가가 사라져도, “뭇 왕조가 사라져도”, 농부는 늙은 말과 조용히 밭을 갈고, 처녀 총각은 사랑을 한다. 전쟁의 연대기는 구름 속으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사랑과 노동의 세계는 이어지고, 그 이야기도 이어진다. 법이 불의가 되고, 정의가 불법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단순성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런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박경미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삶은 기적이다》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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